죄를 식료로 삼는 바이스와 존재만으로 위험한 이노센트, 오컬트 집단과 악을 불사르는 성창염. 별 고유명사가 쏟아지지만 그 본질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결국 나랑 빠구리 한판 뜨자 돼지 쐉년아 이 말이다. 거의 시작할때부터 끝날때까지 어떻게하면 여자애들을 따먹을 수 있을까 그 생각 뿐이고, 조금 진지해질만하면 어김 없이 섹드립이 튀어나온다. 직접 내용을 보면 '하면 죽는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열심히 광고하는 몬스터 프린세스보다 훨씬 노골적이고 솔직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일편흑심은 하면 죽는게 아니라 안하면 죽는다는 거. 이 소설에서 교미란 무엇보다 간절하고 소중한 것이다.
제정신이 있다면 라이트노벨로 쓸 수 없는 소재다. 일주일안에 누군가를 임신 시키지 않으면 본인이 죽는다는 야애니도 있는데, 붕가씬만 없었지 그 발상은 똑같이 천박하다. 그래도 최소한 그건 여자가 두명이었다. 이건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더 위험하다고도 볼 수 있겠다. 아,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소재가 별로라는 건 아니다. 설정이 천박하다는 것은 단점이 아니라 그냥 특징이다. 노골적으로 섹스를 외치는 이 설정, 그것만 봤을때는 나름대로 괜찮았다.
하지만 활용도가 최악이다. 일편흑심의 세계관은 능동적이지 못하며 자신을 드러내는 것조차 미숙했다. 그저 그녀들의 일상에 파문을 일으키며 스토리 진행을 위한 사건을 던져주거나 특정 캐릭터들이 왜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행동하는 것인가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있을 뿐이었다. 번식을 강조하는 설정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그 이외의 설정이 다 병맛난다. 이것저것 쓸데없이 이름만 거창한 것들이 많아 작품 전체의 수준을 떨어뜨리고 집중력을 흐린다. 세계관을 설명하는 기술이 어설프다. 최악은 아니라도 거의 그쯤 갈 것이다.
스토리
전형적으로 이상한 사건을 해결하러 돌아다니는 남녀 이야기다. 식상한만큼 무난하기도 한 방식이다.
전체를 보면 초반에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실실 쪼갤 수 있는 농담과 작은 해프닝 위주로 풀어가다가 뒤로 가면서 급진지해지는데, 특히 제일 마지막 에피소드를 보면 내가 지금 일편흑심을 읽고 있는건지 카연갤에서 병맛 만화를 보고 있는건지 의심하게 된다. 별로 오글거리지도 않고 딱히 스토리를 기대한 것도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참 궁금하다.
참고로 필자는 이 책을 읽는데 2주가 걸렸다.
캐릭터
일편흑심은 사실 캐릭터가 강력한 소설이다. 물론 그래봐야 다른 부분들이 너무 허술해서 상대적으로 캐릭터가 부각되는 것 뿐이지만, 그래도 찾아보면 전체적인 밸런스가 괜찮다는 장점도 있다. 아니, 이건 그냥 특히 매력적인 캐릭터가 없었다는 뜻일 수도 있나? 러브코미디라면서 막상 러브코미디는 안하니까 이런 문제가 일어나는 것이다. 러브코미디를 기대하는 사람은 일편흑심을 사지 않아도 좋다. 빨 애가 정말 한 명도 없다.
* 카란 : 영국에는 '남자가 섹스 외에 생각하는 것'이라는 책이 있다. 대략 200쪽 정도 되는 책인데, 막상 펼쳐보면 아무 내용도 없다. 즉, 남자는 섹스 외에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 라이트노벨로 옮겨놓으면 이런 캐릭터가 탄생한다. 자잘한 설정은 많이 있다. 가사에 능하다, 여장에 능하다, 고백을 가장한 염동력이 있다, 약하다 등... 하지만 가장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 설정은 역시 언제 어디서나 생식을 하고싶어하는 왕성한 성욕. 매일 쳐맞으면서도 씨를 퍼트리고 싶어하는 변태다. 캐릭터로서의 완성도는 나쁘지 않다. 가끔가다 병맛나는 게 문제라서 그렇지, 이정도면 그럭저럭 참신하고 개성있다.
* 키아 : 표지를 장식한 메인 히로인. 무뚝뚝하게 경어체를 쓰고 성스러운 가슴과 성창염을 겸비한 꽃밭 소녀로, 카란에게 항상 표적이 되는 불쌍한 소녀다. 표면적으로는 그런데 실상은 남자 패기를 숨쉬기 보다 잘하는 폭력녀다. 이론상으로는 괜찮을 것 같은데 막상 보면 전혀 귀엽지 않다. 불쌍한 것.
* 재희 : 캐릭터 본인이 인지하듯 세컨드다. 허나 재희 역시 그저 만담을 위한 광대 캐릭터일 뿐, 캐릭터 자체가 뿜어내는 매력은 거의 전무하다고 봐도 좋다. 나름 비중있는 로리 캐릭터를 넣어 다양한 취양을 아우르려는 의도였겠지만 실패다. 중간에 뿌우뿌우하고 화내는 것 빼고는 아무것도 없다. 불쌍한 것.
문장
특별히 기억나는 비문은 없었다. 그렇지만 아주 조금, 정말 아주 조금. 문체 수준으로 녹아있는 일본 이온이 거슬렸다. 지적을 하려니 이정도는 그냥 봐줘도 될 것 같고, 그냠 넘어가자니 또 마음이 편치 않을 정도로 신경을 긁는다. 전체적인 수준을 보면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데, 한 2% 정도가 모자란 느낌이다. 조금만 더 신경을 써줬으면 훨씬 좋았을 것 같아 아쉽다.
아, 중간에 점을 찍는 대신 /을 이용해서 문장을 음/절/단/위/로/ 분/리/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런 건 좀 안했으면 좋겠다. 점을 찍나 슬래쉬를 긋나 어떻게 쓰든 저런 연출은 찌질하긴 매한가지인데, 저래서야 중2돋는다고 까이기 싫어 도망친 것 같아 오히려 보기 안 좋다. 또 그냥 '고백'이라고 쓰면 될 걸 [고백]이라고 쓰는 것도 상당히 거슬렸다. 그냥 원래 있는 거 좀 씁시다.
근데 내가 이렇게 깠다고 해서 나와 호랑이님 따위나 몬스터 프린세스 따위에 비교하면 곤란하다. 일편흑심은 읽기 전부터 어느정도 기대를 하고 꽤 높은 잣대로 저런것들과는 수준 자체를 달리한다. 그렇게 나쁘지 않다.
일러스트
표지만 보면 지금 현존하는 국산 라노벨은 거의 다 쳐바를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엔 취향도 많고 사람도 많지만 솔직히 저 표지보고 끌리지 않을 오타쿠가 어디 있을까?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참으로 바람직한 표지였다.
그런데 내용물이 영. 분명 같은 사람이 그리고 같은 사람이 칠했을텐데 특유의 색기가 팍 죽어버렸다. 그리고 흑백 일러스트로 가면... 한장 한장 넘길때마다 느꼈던 그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