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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픽션을 인정할 수 없어
글쓴이: 하문
작성일: 12-10-31 23:21 조회: 3,310 추천: 0 비추천: 0

000


만화, 영화, 애니메이션, 소설, 게임, 기타 등등........

이 세상에는 픽션이 넘쳐난다.

정말이지, 이루 다 말하지 못 할 정도로 픽션이 넘쳐나고 있다.

우리 곁에 어디에나 픽션이 있고 또한 픽션이 있는 곳에 언제나 우리가 있다.

매트릭스도 아닌데 우리는 픽션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지금의 상황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적당한 픽션은 삶의 활력소가 될 수 있겠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픽션들이 지나치게 많다는 것이다.

과잉 공급, 너무나도 많은 픽션은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는 사람을 양산해낸다. 요컨데 현실과 망상을 구분하지 못하고 픽션을 진짜로 믿어 버리는 녀석들이 있다는 것이다.

판타지에 빠져서 장래희망에 마법사를 쓴다던가, 남몰래 옥상에서 에네르기 파를 연습한다던가, 심하게는 도끼로 사람을 찍어버리는 중학생 야만전사까지 나타났다.

솔직히 말하지,

그런 픽션이 현실에 있기를 기대하며 ‘언젠간 만나지 않을까?’라는 헛된 희망에 빠져 있을 시간에 공부를 해라

마법사? 25살까지 동정을 지켜라 그럼 너도 마법사다.

흡혈귀? 인간의 천적은 모기로 족하다.

늑대인간? 늑대면 늑대고 인간이면 인간이지 늑대 인간은 뭐래

좀비? 윌 스미스의 할아버지가 와도 안 생긴다.

이러한 픽션들이 당신의 꿈과 희망이라면 단언컨대, 당신에게 이 세상은 꿈도 희망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세상이란 회색빛 콘크리트로 만들어져 있으니까. 첫 번째는 학교, 두 번째는 회사라는 잿빛 콘크리트로 말이다. 모험도 없고, 꿈도 없고, 희망도 없다. 그저 먹고 살기위해 현실과 마주해야할 뿐이다.

인생은 시궁창이고 걸어가는 길은 가시밭길이다.

그게 현실이다.

그리고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지하철에서도 몇 가지 현실들이 있다.


이를테면 저기 대학생A.

학교라는 안전한 시스템에서 내팽개쳐진 새내기 1학년, 처음으로 자유를 만끽하지만 이 자유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몰라 시간을 흐지부지 보내다가, 술 여자 클럽에 빠지고 공부는 뒷전, 그런 그에게 남겨진 것은 낙오된 학점과 학자금대출로 인한 700만원의 빚, 뒤늦게야 어영부영 학점을 올리기 위해 발버둥 치다가 이제 곧 군대를 가야한다는 좌절과 절망이 뒤섞여 있는 현실 속에 살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젊은 회사원B

패기 좋은 신입사원, 회사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일에 대한 열정과 야망으로 불타올랐지만 추가노동에 시달리면서 열정이 식고 그에 반해 급료도 좋지 않아 다른 회사로 이직을 해볼까 생각해보지만 청년실업자가 되기는 싫어서 명백한 부당노동임에도 순응하며 살아가는 현실 속에 살고 있다.


그 옆의 한숨을 푹 내쉬는 머리가 반쯤 벗겨진 회사원C의 현실은 어떨까?

40세의 과장, 치고 올라오는 새파란 후배들과 다가오는 정년퇴직의 위협, 아이들은 커서 학원비도 만만찮게 들어가는데, 퇴직하면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나, 때늦게 다시 시작하려니 젊음을 잃어버렸다는 걸 깨닫는다.

아아 현실이여, 고민에 고민 하지만 답은 없는, 이런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이런 현실이기에 더욱이 진정한 희망을 찾을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역은 xxx, xxx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이번 역은 전동차와 승강장 사이가 넓어 발이 빠질 위험이 있사오니 내리고 타실 때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안내원의 말에 따라 지하철 문이 열리고 또 다시 수많은 현실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이러저러한 현실들이 뭉개지고 뭉개져서 굳어져버린, 언제나와 같은 만원 지하철의 안.

정말로 뜬금없는 이야기지만, 어느 날 갑자기, 너무나도 급작스럽게,

이렇게 혼잡한 지하철 속이 찰흙덩어리 같다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공작시간에 한 번쯤은 다들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지점토로 만든 인형들을 공작시간이 끝나면 가차 없이 손으로 뭉개버리는, 아니면 뭐라도 만들었다가 맘에 들지 않아 다시 구겨버린 그런 찰흙 덩어리, 사람이라는 것을 지하철이라는 상자에 억지로 구겨놓은 듯한 모습.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등교하는 동안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뭉쳐진 진흙덩어리들이 어떤 형태였는지 관찰하는 것,

그런 쓰잘데기 없는 사색, 이른바 ‘현실관찰’ 이라는 것이다. 이름은 거창하지만 별거 없다.

자, 그럼 오늘은 또 누구를 관찰해볼까?

아침부터 술 냄새를 풍기는 저기 저 주정녀를 관찰할까? 아니면 지하철에서까지 수학문제를 풀고 있는 재수생을 관찰해볼까? 그런 식으로 쓸 때 없는 사색을 위해 관찰대상을 물색하고 있었을 때였다.

지하철이 덜컹 거리고, 자리를 잡지 못한 나는 뒤에 있는 사람과 부딪혔다. 살짝 고개를 숙여 주위에 죄송하다고 하려는 그때에,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녀가, 아니 정확히는 그녀가 들고 있는 요상하기 그지없는 카드가.


‘타로 카드인가?’


하지만 타로카드라는 것은 꽤나 아기자기한 느낌으로 이쁘게 만드는 데, 그 카드에서는 전혀 그런 느낌을 받을 수가 없었다. 그러긴 커녕 생리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그로테스크한 그림, ‘고어’라고 하던가? 그런 괴기한 형태의 카드가 무려 3장. 그 이상한 카드에 그려진 것은,


시체의 산위에서 군림하는 흡혈귀,


괴로워하면서 무덤을 방황하는 좀비,


달밤에 울부짖는 늑대


........라니 소녀취향치고는 너무 심하지 않은가! 나는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자 시선을 눈치 챈 듯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모르는 척, 모르는 척........’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돌린다.

관찰한답시고 사람을 빤히 쳐다보았다가 시비가 걸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럴 때의 대처는 평정심이 중요하다. 전혀 당황하지 않는 포커페이스, 모든 것이 착각, all your fault 라는 마인드로 침착하게 무시해야 한다.

시간이 한참쯤 지나 뭐 이정도면 됐겠지 하고 생각해서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켁! 그녀는 아직도 나를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서로의 시선이 어색하게 교차한다.

아니 어색했던 것은 나뿐, 그녀의 반응은 색달랐다.

그녀의 눈 꼬리가 얇게 올라가며 하회탈 같은 미소를 그린다. 매혹적인 눈웃음, 나는 한순간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녀가 작게 중얼거린다.

지하철 안의 가지각색의 소리에 묻혀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내가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을 짓자 그녀는 정말이지 장난처럼 내 얼굴에 다가와, 여전히 들리지 않을 듯한 목소리로 나에게 속삭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의 입모양을 따라 중얼거렸다.


“당신 오늘 죽습니다.”


뭐.......?





001



제정신이 아니다.

뭐지 그 여자, 초면한테 해도 되고 안 해도 될 말이 있는 거지 대뜸 죽는다니, 도를 아십니까? 보다 너무하잖아

내가 멍해져 있을 때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 버린 건지 그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버렸다. 덕분에 나는 어이없는 기분으로 등교 중, 학교에 들어와 계단을 올라가는 중이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었다.

뜬금없이 길에서 말을 걸어 풍채가 좋다느니, 풍기는 기운이 남다르다더니, 고래도 춤추게 할 갖은 칭찬을 다하고는 기공에 흥미 있냐고 물어보더라.

그때 중학생이었던 나는 블렉헤드 그러니까 모공밖에 흥미가 없다고하자 학생이란 걸 안 뒤로는 뜯어 먹을 돈이 없다고 판단한 건지 금방 가버렸지만

그 여자도 그런 부류의 사람인걸까? 꽤 멀쩡하게 생긴 것 같았는데

“........”

아니, 멀쩡하게 생겼었나? 잠깐 그 여자 어떻게 생겼었지?

꽤 오랫동안 쳐다봤었던 것 같은데 얼굴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렇게 쉽게 잊혀질 외모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저 막연하게 여자라는 사실밖에 머리에 남겨진 게 없다.

목소리는 어땠었지 높았던가? 낮았던가? 톤은 허스키했던가? 그리고 또 뭔가를 봤었던 것 같은데 불쾌한 뭔가를.

생각이 깊어질수록 수렁으로 빠지는 것만 같아서 계단을 오르지 못하고 멍청하게 서있었다.

그러다가 결국엔 다 바보 같아졌다.

그런 거야 정말 아무래도 좋은 일 아닌가?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할 바에 영어단어 하나라도 외우는 게 훨씬 생산적인 일이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마지막 계단을 올랐을 때, 누군가와 부딪혔다.

여자였다. 명찰 색깔로 보건데 후배였다. 나보다 한 학년 낮은 고1, 이름은 미별하

특이한 이름이다.

도대체 복도에서 전속력으로 달려와야할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미별하는 엄청난 속도로 내 가슴팍에 부딪혀 왔고 충격을 이기지 못한 나는 그대로 엎어졌다.

발이 엉키며 계단을 뒹굴렀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웃기지도 않는 기승위의 형태로, 내 위에 올라탄 후배가 날 멀뚱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정확히 내 손은 그녀의 가슴을 만지고 있었다.

농담 아니다.

다시 한 번 손에 힘을 줘보니 물컹하고 마쉬멜로 같은 게 쥐어진다. 가슴 맞다. 아니, 정말 가슴이 맞는 걸까? 다시 한 번 확인해보자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불꽃같은 싸닥션이 날라와 나의 가녀린 볼을 강타했다.

뭐 당연한 거겠지, 건실한 정당방위다. 자신이 먼저 부딪혀 놓은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억하심정을 드러내며 덮쳐진 건 나지만 덮쳤다고 내일이면 교내에 소문이 퍼지겠지

그냥 밤길을 걸었을 뿐인데 스토커로 오해받는 그런 식의 반응, 대한민국에서 남자로 태어났을 뿐이데 예비성범죄자로 인식받는 그런식의 반응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미별하의 반응은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아 상처가......!”

그녀는 짧은 탄식을 내뱉더니 내 볼을 감싸 쥐었다. 하도 얼얼해서 눈치 못 챘는데 맞은 곳에 상처라도 난 모양이다.

그렇게 쎄게 때려놓고 이제 와서 미안하기라도 한 모양이지?

병 주고 약 주는 태도에 나는 어이가 없어서 미별하의 얼굴을 째려보았다.

째려보고 따지려 했다.

근데 미별하의, 그 표정이 마치, 너무나 절망적이어서ㅡ

당황한 나머지 내가 말을 잃고 말았다.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그런 표정, 그것은 성희롱 피해자의 표정이 아니었다.

예기치 않은 살인 사건이라도 일으킨 가해자의 표정이었다. 그러고는 그녀는 도망치듯이 복도 끝으로 사라져 버렸다.

“뭐냐고 대체.......”

터벅터벅, 혼자 남겨진 나는 다시 교실로 걸어간다. 교실 문을 열자 학생들이 듬성듬성 앉아있었다.

내 자리는 창가의 맨 앞쪽에서 2번째, 그리고 그 앞, 창가의 맨 앞 쪽에는 K가 있었다. 지하철에서 주워온 공짜 신문을 보면서 K는 내가 온 것을 곁눈으로 살핀다.

“여어~”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넨다.

“상처는 어떻게 된 거야?”

신문을 보면서도 상처에 대해서 잘도 알아채는 K,

“모퉁이 돌다가 여자애랑 부딪혔어.”

“만화냐?”

“그래서 실수로 여자애의 가슴을 만졌더니 따귀를 맞았어.”

“변태냐?”

이런 식으로, 후배와 부딪혀서 계단에서 뒹굴렀다는 이야기는 하하호호하며 농담하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갈 일이었을 테지만, 머릿속에는 자꾸만 미별하의 절망적이었던 표정이 떠올라 쉽게 웃을 수가 없었다.

에이 지워버리자, 쓸 때 없는 생각은 사회를 무너지게 하고 가정을 파탄 내는 법이다.

“오늘 쪽지시험 범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냐?”

책상을 뒤적거리며 K에게 물었다.

“10P~12P 정확히 50개, 그래도 겹치는 게 많아서 시간은 별로 안 걸릴거다.”

“수재인 너한테나 안 걸리는 거겠지”

쪽지시험은 담임이 준 영어단어장 암기를 말하는 걸로, 저번 고사에서 우리 반이 영어에서 꼴등을 했기 때문에 꼭지가 돈 담임이 아침조회마다 매일 시키고 있다.

“담임이 영어선생이라 고생이지 영어단어를 매일 아침마다 외워야한다니.......“

한숨을 내쉬며 서랍에서 영단어장을 꺼내는 나,

아침 조회가 시작하기까지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니, 시간이 빠듯하게 걸릴 듯해서 급하게 외우려는데, 고개를 들어보자 K가 경직된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사람 얼굴보고 뭐 그리 식겁을 해 기분 나쁘게”

빈말이 아니라 진짜 기분이 나빴다. 아침에 만난 후배도 그런 식으로 정색을 하더니 K마저도 이 모양이다. 뭐지 요즘은 대놓고 정색하는 게 유행인가?

“아니 너 방금 상처에서 구더기 같은 게.......아냐, 잘못 본 것 같다.”

K는 그렇게 말하며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시답잖기는.........




002


남자는 기술을 배우고 여자는 가정을 배웠던 시절이 있었더랬다.

헌법에 명시된 남녀평등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곧 바로 폐지되고, 이제는 남녀 구분할 것 없이 학생들 모두가 가정과 기술을 배우게 되었지만, 평등이고 나발이고, 가정을 여자가 좋아하고 기술을 남자가 좋아하는 것은 단지 기호의 차이일 뿐, 결국 가정시간에 집중하는 건 여학생이고, 기술시간에 납땜하는 건 남학생이지 않던가?,

그래서 이 학교에서는 기술과 가정을 남녀 2인 1조로 듣게 하고 있다.

남녀가 서로 각자의 수업시간에 도태되지 않도록 하는 능률 좋은 시스템이라는 것 같은데, 같은 반이라지만 말도 한번 안 붙여본 여학생과 억지로 붙이게 하다니 이 얼마나 안일한 생각인가

덕분에 여자가 리드하는 가정시간에는 남자애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서리나,

외모는 그럭저럭 수준급이지만 더러운 눈매를 가졌고, 남자한테 까칠하기로 유명한 여자애다.

별명은 서리한, 프로스트 모운.

모르는 걸 물어보기 껄끄럽게 왜 하필 이 여자와 짝이 된 건지, 정말이지 골치가 아프다.

게다가 이번에 배우는 건 자수로, 물론 내 인생에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이다.

하지만 수행평가 점수가 걸려있기에 포기할 수도 없는 일. 할 수 없이 독학으로 책을 이리저리 살펴가면서 바느질을 연습하려 했다. 그런데,

“홈질? 박음질? 공그르기? 바이어스는 또 뭐야?”

알 수 없는 단어들이 가정책에서 깽판을 치고 있었다. 진정 이게 세종대왕께서 만드신 한글이란 말인가? 갑자기 영어 독해가 너무 그리워졌다.

한참을 그렇게 얼빠진 표정으로 읽혀지지도 않는 책을 겉으로 만 읽고 있자니, 슬슬 속이 쓰리기 시작해서, 가정시간의 수행평가 따위 엄마에게 맡기면 된다고 놀고 있는 다른 남학생들이 부러워 미쳐 갈 때쯤이었다.

내가 난감해 하고 있는 걸 눈치 챈 건지, 서리나가 쭈욱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숨을 크게 한번 내쉬고는,

“정말 남자들은 어쩔 수 없네, 줘봐!”

하고 서리나의 새하얀 손이 나를 향해 뻗어왔다.

자존심이고 뭐고 도움의 손길이 간절했던 나는 얼른 자수세트를 넘겨 버렸고, 내 자수세트를 받아든 서리나는 자세를 고쳐잡았다.

“한번 밖에 설명 안 할 테니까, 잘 봐둬”

말 안 해도 그럴 참이었다.

그 퉁명스러운 말투를 시작으로 서리나의 자수학 개론이 시작되었다.

비아냥거리는 게 아니라 정말 그 정도로 능숙하게 잘 가르쳐 주었기에 하는 말이다.

먼저 이론과 단어부터 설명하고, 바느질을 할 때는 한 번 보여주고 다시 따라하게 해서 체계적으로 가르쳤다. 바느질이 삐뚤어지지 않도록 꼼꼼하게 바로잡아주고 어설프게 이해하고 넘어가지 않도록 완전히 이해했는지 재차 물어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란 것은, 서리한이라고 불릴 정도로 냉정한 여자라고 들었는데 실은 굉장히 친절한 녀석이었구나 라는 것이다.

뭐 소문이라는 것은 부풀려지기 마련이니까.

“너 자수 잘하는구나.”

“이런 건 자수라고도 안 해, 그냥 기본적인 바느질이라고 이제 혼자서 할 수 있겠어?”

라며 자수세트를 다시 돌려주는 서리나.

“그렇게 설명해줬는데 못 하는 게 이상하지”

왠지 모르게 자신감이 붙었다. 어쩐지 지금이라면 할 수 있을 것만 같아!


-1분 뒤-


실패했다.

좀 더 부연설명을 붙이자면 의욕이 과잉된 탓에 바늘에 손을 찔렸다. 그것도 얼마나 깊게 찔렀는지 검지 끝에서 피가 스멀스멀 올라오더니, 이내 뚝뚝 떨어진다.

아파죽겠다. 골무인가 뭔가를 썼어야 했는데 서리나가 골무 없이 능숙하게 하는 걸 보고 괜찮겠지 한 게 실수였다.

‘휴지가 어디 있지?’

피가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 하면서 주위를 뒤적거리는데, 갑자기, 서리나가 내 손목을 강하게 붙잡았다.

“뭐, 뭐야”

내 당황스런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서리나는 손을 놓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내 손을 자신의 입가로 가져갔다. 힘이 얼마나 센지 저항해도 소용이 없다.

보통 여자가 이렇게 힘이 세던가? 아니 그보다,

보통 여자의 눈이 저렇게 반쯤 풀려 있었나?

그럴 리가 없지, 한눈에 확인이 가능할 정도로 서리나의 상태가 이상했다.어딜 봐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완전히 동공이 열린 채로 서리나의 시선은 내 손가락에만 꽂혀있었다. 주위는 이미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듯했다.

그리고 완전히 내 손가락을 자신의 입가로 가져온 서리나는 자세를 낮추고,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을 받아먹듯이, 내 손가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를 혀를 내밀어 음미했다.

혀가 길다. 뱀의 그것처럼,

서리나의 혀가 핏줄기를 따라 손가락으로 올라온다. 이윽고 그녀의 혀가 내 상처에 다다랐을 때 그녀는 음미하는 것을 멈추고 탐닉하기 시작했다.

내 손가락을 완전히 자신의 입에 가져다 넣고, 그 기다란 혀를 입안에서 굴리며 상처를 핥는다.

너무도 어이없는 상황에 내가 당황한 것도 있었겠지만, 온몸이 마비 된 것처럼 나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저 내 손가락이 서리나의 혀에 유린당하는 것을 멍하니 지켜볼 뿐

이윽고 서리나의 혀를 만족시키던 피가 말라버리자,

모자라다는 듯이, 더 내놓으라는 듯이, 그녀는 내 손가락을 깨물었다.

그때서야 나는 이성을 되찾고

“너, 뭐하냐?”

두려움 반, 황당함 반이 섞인 얼굴로 서리나를 쳐다보았다.

서리나도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마약환자 같았던 눈빛에서 다시 매서운 서리한으로 돌아갔다가, 이내 당혹스런 표정으로 내 손을 팽개치고 뒤로 물러섰다.

자신이 뭔 짓을 했는지 그제 서야 인식한 듯, 치부라도 들킨 것처럼 부끄러운 표정을 짓고는 손으로 입가를 가린다.

“기분 나빠.......”

라고 나지막하게, 들리지 않을 듯한 목소리로 그렇게 지껄였다.

그리고 획 돌아서서는, 방약무인하게도, 선생님이고 수업시간이고 뭐고 없이,

“양호실이요” 하고는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정말 어이가 없어서........

내가 더 기분 나쁘다고 요년아




003


아침 자습시간 1시간, 정규 수업 7시간, 야간 자율학습 5시간, 평균적으로 13시간을 학교에서 지내며 공부하고 집에 들어가면 쓰러지듯이 잠이 든다.

그게 고2의 현실이다. 차라리 고3이 되면 그나마 낫다고들 한다. 선생님들도 포기하기 시작해서 될 놈과 안 될 놈을 가린다고 하니까

그렇게 미친 듯이 공부하고 학교를 나오면 10시다. 자습실에서 해가지는 것을 본 적도 없는데 벌써 밤이다.

공기가 차다. 하늘에는 해대신 보름달이 떠있었다.

“잘도 이런 식으로 생활하는구나?”

K는 말한다.

“비꼬는 거냐? 너도 똑같은 생활을 하고 있잖아”

약간 빈정상한 나는 그렇게 대꾸했다.

그러자 K는 고개를 저었다.

“나와 너는 달라, 나는 여태껏 부모님의 기대라던가 주위의 기대를 받으면서 공부를 해왔고, 앞으로도 그 기대를 위해서 공부를 해야만 해”

“기대 때문에 공부를 한다는 거야?”

“엄청 바보 같지? 하지만 어렸을 때는 그 기대라는 것에 소소한 행복을 느꼈어. 그 이후로 기대라는 건 나의 전부가 되어버렸고, 앞으로 공부 없이 어떻게 살아야할지 감도 오질 않아”

그렇게 말하는 K의 표정은 꽤나 진지했다. 공부가 자신의 전부라니, 우등생다운 발언이라고 생각하고 웃어 넘겨야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기엔 K의 표정이 어째선지 쓸쓸해보였다.

내가 아무런 말도 하고 있지 않자

“말해봐, 너는 왜 공부를 하는 거니?”

라고 K가 먼저 나에게 질문해왔다.

살짝 놀랐다. K가 나에게 질문했던 적은 아마 처음이 아닐까? 모르는 문제 때문에 항상 질문했던 것은 나였으니까

“모르겠어.”

K의 질문에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얼버무렸다고 해도 좋겠지, 그 후 K와는 교문을 나서자마자 헤어졌다.

왜 공부를 하는 걸까?

K는 부모의 기대 때문에 공부를 한다고 했다. 그럼 나는?

나에게는 부모가 없다.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자살했다. 누구도 기대하지 않는 데, 왜 공부를 하고 있는 걸까? 가고 싶은 대학도, 이루고 싶은 꿈도 없는데,

사실 답은 알고 있었다.

“그게 현실이니까”

그래 그게 나의 답이다. 하지만 그 답은 내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 답은 내 옆을 지나쳐가는 어느 여자아이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착각일까? 여자아이는 아무런 낌새도 없는 채로 그저 지나갈 뿐이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왜냐하면 스쳐지나갈 때 봤던 여자아이의 모습이, 지하철에서 만난 그 여자와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대뜸 없이 내가 오늘 죽는다고 했던 그 여자 말이다.

“아니, 근데 뭔 여자가 저렇게 걸음걸이가 빨라?”

내 옆을 스쳐 간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것 같았는데 그녀는 벌써 시야 밖으로 사라지려하고 있다.

“이봐!”

다급해진 내가 소리쳤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약간 소리 질러도 괜찮겠지

하지만 그녀는 못들은 건지 못들은 척을 하는 건지 그대로 걸어갈 뿐이다.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은 채로, 멈추지 조차 않은 채로.

농담이지? 얼마나 더 크게 소리를 질러야 하는 건데?

할 수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자취를 뒤쫓으며, 숨을 헐떡거리며 달리고 있다.

‘아, 운동을 제대로 해본 적이 언제였더라.’

기억이 안 난다. 기억이 안날정도로 오래됐으니 벌써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밤공기가 차가운 탓도 어느 정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진즉에 따로 잡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잡힐 것 같으면 모퉁이를 돌아서 저 멀리 가있고, 다시 또 따라 잡으면 갈림길 같은 데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고, 도무지 잡힐 것 같으면서도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다. 마치 따라 올 테면 따라와 보라는 듯이, 간단히 날 뿌리쳐 내고 있다.

저 여자가 날 놀리는 건가? 왠지 오기가 생겼다.


는 거짓말이다.


내가 왜 저 여자를 필사적으로 쫓아야 한단 말인가?

설사 따라잡았다고 해도,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한단 말인가?

스토커나 강간마로 오해받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오밤중에 아침에 만난 이상한 여자와 추격전을 벌이는 게 내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리고 진짜로 그 여자가 맞는 지 아닌지도 확실치 않잖아?

집 가서 발 닦고 자고 내일 아침도 등교해야 하는데, 이게 무슨 짓거리인지

잠깐 내가 헤까닥해서 정신 줄을 놓고 왔나보다. 그래, 집으로 돌아가자. 근데,

“여기는 어디냐?”

너무도 황당한 나머지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어디인지도 모를 나무가 우거진 곳에 있었다.


내가 미쳤지.

내가 미친놈이지,

나이가 몇인데 미아냐? 도심 한 가운데에서 길을 잃어버리다니 제정신인거냐.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그렇다고 사람을 붙잡고 여기가 어디죠? 라고 말하기는 더욱 부끄러웠다. 그보다 사람도 없다. 도대체 어디냐 여기는.......

산속? 아니, 나름 길이 잘 정돈 된 것 보면 공원 같기도 한데, 어두워서 그 길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일단 이 길을 따라 걷고 큰길로 빠지다 보면 익숙한 길이 나오겠지. 그렇게 계속 걸은 결과,

나오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이 길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었다. 못해도 몇 십분은 걸은 것 같은데 제자리를 맴도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렇게 몇 분을 방황하고 몇 번이나 소리쳐 보고 ‘이거 내일 아침까지 여기서 못 빠져 나오는 거 아냐?’ 란 생각이 들어 반쯤 포기하고 있었을 때,

“그르르르르.......”

등 뒤에서 목에 가래라도 낀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등줄기를 관통하는 듯한 오한이 서린다.

등 뒤를 압박하는 시선, 그 시선에 못 이겨 내가 뒤를 돌아봤을 때,

그곳에는 엄청나게 덩치가 큰, 인간의 반려동물로서 정말 이래도 싶나 싶을 정도로 너무나 큰, 개가 있었다.

그것도. 인간으로 따지면 크라우칭 스타트, 그러니까 금방이라도 달려들을 듯한 자세로 거친 입김을 내뿜으며, 날카로운 이빨을 자랑하듯이 드러내고, 그리고 어딜 봐도 명백하게 적개심을 들어내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냅다 달렸다.

어두워서 저 개가 커 보이는 건가? 아니면 내 두려움 때문에? 뭔지는 모르겠지만 저 정도 크기의 개한테 물렸다간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

의문의 변사체로 9시에 뉴스에 나오는 것은 싫다. 들개한테 물려죽었다고 꼴사납게 사후확인 되는 것도 싫다.

진짜 죽어라고 달렸다.

운동한지가 오래됐고 밤공기가 차고 어쩌고저쩌고를 떠나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속도로 숲 속을 따라 달렸다. 하지만 4발로 달리는 동물을 2발로 달리는 인간이 뿌리칠 수 있을 리가 없었고, 결국 나는 따라잡혔다.

그리고 물렸다.

있는 그대로의 의미로의 그 개자식이 따라와서는, 그대로 덮쳐들어 내 팔을 물었다.

비명도 채 지르기 전에 돌진속도에 못 이겨 뒤로 넘어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뒤쪽이 경사진 수풀이라 그대로 굴러 떨어졌다. 때마침 굴러 떨어진 곳이 정돈된 잔디밭이라 큰 상처는 없었다. 온 몸이 쑤시긴 했지만

위기상황에 놓이면 정신이 맑아진다는 말이 있었는데, 개뿔 내 정신은 혼란스럽기 그지없을 뿐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정신을 차려 그 개자식의 위치를 파악하려는데,

찾을 필요도 없었다. 그 개자식은 또 내 뒤에서 그르렁 소리를 내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아까 그 개자식의 태도가 미쳐 날뛰고 싶어서 금방이라도 달려들려는 듯한 태도였다면 지금은 마치,

두려워하는 듯한,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이라도 쳐진 것처럼 더 이상 나에게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결국 포기한 것인지 수풀 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안도의 한 숨을 내쉬는 나,

결국은 만물의 영장인 인간한테 이길 수 있는 생물은 없는 것이다. 그걸 뒤늦게라도 알아채줘서 고맙기 짝이 없다. 개자식아.

는 그럴 리가 없지.

그 개자식은 나를 완전히 얕잡아 보고 있었다. 먹이사슬로 따지면 분명히 강아지풀보다 아래에 있을 것이다.

그럼 무엇을 두려워해서 도망갔단 말인가

간단하다. 나보다 무서운 대상이 이 근처에 있으니까.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곳에는,

석상이 떡하니 놓여 있었다.

중학교 수학여행으로 제주도에 가서 보았던 돌하르방 비슷한 석상, 하지만 돌하르방이랑 달리 구멍이 송송 뚫려 있지도 않았고 생김새도 약간 달랐다. 웃기지도 않는 벙거지 모자 대신, 사극에서나 나올법한 관복과 모자를 쓰고 있었고, 무엇보다 제법 위엄이 있었다.

이것 때문에 도망갔었던 건가? 인간의 위엄이 이런 석상만도 못하다니

약간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주위를 둘러보자 현충원에서나 볼 듯한 반구형 모양의 무덤과 묘비가 있었다.

이걸 지키는 석상인가? 나는 다가가 묘비를 살펴보았다. 한자가 빼곡히 적혀져 있어 뭐라 써져 있는 지 알 수가 없다.

“무덤, 묘비, 석상이라.......그렇군.”

그제 서야 여기가 어딘지 깨달았다. 등교할 때마다 봤었는데 어째서 일찍 깨닫지 못했던 걸까?

성역공원화사업인가 뭔가 해서 옛날에 높으신 분들을 모셔두었던 무덤을 공원의 형태로 바꾼 곳이다. 이름이 아마 무슨 신도비인가 했었는데, 한자로 되어있어서 기억은 나질 않는다.

말하자면 리틀 현충원,

같은 곳이라 무덤가로 난 길을 따라가면 아마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어렸을 때 선생님이 개인의 사유지이니 들어가지 말라고 했었는데 이렇게 들어와 보다니 뭔가 감개무량하기도 하고, 못 보도록 꽁꽁 감춰둔 것치고는 그다지 볼 것도 없는 것 같다.

“그럼 이 사유지에 있는 그 개자식은 애완견인가?”

문득 그런 질문이 들었다.

설마 아니겠지, 무덤 쪽으로는 아예 내려오지도 않는 것 같고, 그리고 무엇보다 남의 애완견과 사투를 버리고 있었다는 건 정말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다.

나무가 우거진 숲과는 달리, 무덤가는 탁 트인 들판이 많아 길을 헤매지는 않았다. 게다가 보름달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에 출입구까지 쉽게 내려올 수 있었다.

출입구는 사극에서나 볼법한 기와대문이었는데 경복궁이나 숭례문처럼 지나치게 큰 문은 아니었지만, 옛날식 문고리와 붉은 색으로 된 기둥이 인상적이었다.

근데 이거 열리려나?

한번 밀어 보았다.

열리지 않는다. 가운데 있는 대문은 말할 것도 없고 좌우에 달린 쪽문도 열리지 않았다.

뭐, 사유지에 불법침입 했는데 당당하게 정문으로 나갈 수는 없으니까 할 수 없이 벽을 넘기로 한다.

벽의 크기는 대략 2m 정도, 그렇게 높은 돌담이 아니라서 쉽게 넘을 수 있거니 했는데

타고 넘기에는 위에 놓여진 기와가 굉장히 거추장스러웠다. 결국 돌담 위에 있는 기와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되는 일이 없다.

오늘은 진짜 마가 낀 날인가 보다.

아침부터 죽는다는 소릴 듣질 않나, 후배랑 부딪히질 않나, 바늘로 손을 찔리더니 정신 나간 동급생이 그 손을 빨아재껴 버리고, 남의 사유지에 불법침입해서 개한테나 물리고 있다.

아 맞다. 개한테도 물렸었지, 하도 경황이 없다 보니 몰랐는데, 상처는 어떻게 된 거지?

라고 뒤늦게 깨달은 나는 물려버린 오른쪽 팔을 달빛에 비춰보았다.

그런데, 상처가 없었다.


“분명 물렸는데........?”



004


이상이 하루 동안 내가 겪은 사건의 전모이다.

어떻게 보면 평범할 뿐이고, 어떻게 보면 비범할지도 모르는 일련의 사건들이지만,

‘이상한 여자를 만났다.’ ‘후배와 부딪혔다.’ ‘바늘에 찔렸다.’ ‘개한테 물렸다.’ 단순히 그렇게만 생각했기에 집에 돌아와서 씻고 잠이 들 때까지, 눈을 뜨고 나면 나는 평범하게 내일을 맞이할 거라고 생각했다.

너무나 멍청하게도

너무나 둔감하게도,

폭풍의 눈 속에서는 바람을 느낄 수가 없음을 나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당신 오늘 죽습니다.’ 라고 말했던 그녀의 말은 진실이었고, 오늘 일어난 일은 예고편에 불과했으며, 진짜 사건은 다음 날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다.





005


다음날,


곤란하다.

난 지금 매우 곤란한 상황에 처해있다. 눈꺼풀이 무겁게 느껴지고 술이라도 먹은 것처럼 상황판단이 안 되며, 뇌에서 보내는 의사가 제대로 전달이 안 되는 것 같은 느낌이다.

한마디로 졸려죽겠다.

어젯밤, 집에 늦게 돌아오는 바람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러나 인간의 몸은 얼마나 합리적인지 수면시간과는 상관 없이 평소시간대에 일어나더라.

덕분에 비몽사몽으로 등교하기위해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다.

이거 참 웃어야할지 울어야 할지

“저기요........”

그나마 다행인 게, 어제 그렇게 뛰어다니고도 근육통이 나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허벅지고 어디고 쑤시기 시작해서 난리법석이여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어디 하나 아픈 곳이 없다. 무엇보다 뭐랄까, 좀, 근육이 생겼다고나 할까? 평소에 보던 지방덩어리 가득한 내 몸 같지가 않다. 몸매에 각이 지고, 팔뚝에는 실핏줄이 튀어나와 있다.

설마 어제 그것 좀 운동했다고 근육이 생겼다는 건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아마도 졸려서 사리분별이 안 되는 것 같다.

“저기요.......!”

거봐 자꾸 누가 부르는 듯한 목소리가 들리잖아. 렘수면과 비렘수면의 교차로에서 정신을 못 차리고 멘탈이 행방불명된 게 분명하다.

........아니지 졸립다고 환청이 들리다니 그게 더 말이 안 되는 소리지.

결과적으로 말하건 데, 나를 부르는 목소리는 환청 같은 게 아니었다.

즉 목소리에 근원은 이러했다. 왠 소동물 같은 여자아이 하나가, 꾸벅 꾸벅 졸고 있던 내 옆에서 말을 걸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여자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저기....... 핸드폰 번호 좀 주시겠어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거 뭐지 신종 사기인가? 하지만 부끄러워하는 소녀의 태도는 도저히 사기칠만한 것이 아니다. 내가 긴가민가하며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쯤, 그 여자아이가 자신의 핸드폰을 내게 건넸다.

“저 제가 이런 걸 잘 못해서......”

이건 확실하다. 설마 내가 헌팅을 당할 줄이야.

하아 이 몸의 인기란, 나도 참 죄 많은 남자로다.

라고 말해도 사실 처음이다. 스스로도 자신이 바보 같이 느껴질 정도로 버벅거리며 핸드폰 번호를 적어댄다.

아니 근데 도대체 얘는 누구지? 교복을 보면 같은 학교인건 분명한데,

그제 서야 멍청하게 명찰을 확인하는 나.

단정하게 매무새를 고친 교복에 달린 노란색의 명찰에는, 검은 색의 자수로 미별하라고 적혀있었다.

그 여자였다.

그 후배였다.

어제 계단에서 부딪히고 내 뺨을 날려버린 그 미별하였다.

번호를 다 적은 내가 핸드폰을 건네자 미별하는 직각이라고 해고 좋을 정도로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다음 승강장으로 가버렸다.

뭐지 대체? 뭐냐고 이 뻘줌한 상황?

그에 대한 대답은 핸드폰에서부터 울려왔다. 때 마침 지하철이 온 터라 핸드폰에 문자를 확인하며 지하철에 오른다.

『사과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요.』

미별하한테서 온 문자 메시지는 이러했다.

사과? 부딪혔던 일 때문인가? 내가 생각해도 조금 세게 맞았다고는 생각하지만, 그것 때문에 핸드폰 번호까지 알아내서 사과하다니 보기 드문 착한아이다. 이런 애한테 다짜고짜 따지고 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지 선배로서 넓은 아량을 보여주도록 하자.

『그때 그 일이라면 난 괜찮아 신경 쓸 필요 없어.』

이 정도면 됐겠지 하고 송신 버튼을 누르는 순간,

부르르르, 벌써 답장이 도착했다.

답장이 진짜 빠르다. 과연 현역 여고생 문자치는 속도가 보통이 아니다. 근데 제대로 읽기는 한 거니? 나름 신경 써서 쓴 건데

미별하가 다음으로 보내 온 문자는 다소 부산스러웠다.

『아뇨 제가 말하고 싶은 건 그게 아니라 아니 물론 그것도 사과드려야 할 테지만....... 아니, 그러니까.......』

한 문장에 부정형이 몇 개나 들어간 거야. 뭘 문자로 주저하고 있는 건지, 생각이 정리된 다음에 문자를 적으란 말이다.

또 다시 부르르르, 내 생각이라도 읽은 듯이 다음으로 온 문자 메시지는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대로 가면 당신은 곧 죽을 거예요.』

너무 정리되어 있었다. 뭐라는 거야,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최대한 신속하게 답장을 보냈다.

이런 상황을 데자뷰라 하던가? 어제도 이런 식으로 지하철에서 죽는다는 소리를 들었었지

뜬금없이 당신 오늘 죽습니다♡ 하는 게 무슨 유행인가

공부하느라 속세에서 멀어진 내가 최신 트렌드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어쩌면 드라마에서 나온 작업 멘트일지도 몰랐다. tv 안보니까 말이지

부르르르, 다시 미별하에게서 답장이 왔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최신트렌드도 아니었고, 티비에서 나온 작업멘트도 아니었고, 시답잖은 농담도 아니었다. 미별하는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했던 것이다.

『어떻게 설명해도 믿지 않을 거란 걸 알지만, 꼭 들어 주셨으면 해요.』

어디까지나 진지함이 가득 찬 문자메시지 한통이 날라 온 후, 한동안 내 핸드폰은 울리는 일 없이, 침묵을 유지했다.

그리고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 미별하에게서 한통의 메일이 날라 왔다. 옆에 있는 스크롤바가 밀리 단위로 축소 될 만큼 기나긴 장문이었다.

『선배는 지금 기생충에 감염되어 있어요. udr-101이라고 불리 우는 이 기생충은 학계에 발표된 게 아닌 비공식 명칭이라 제대로 된 이름은 없습니다만, 우리는 편하게 ‘유디르’라고 부르고 있어요. 이 유디르라는 기생충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기생 생물이라, 보통의 기생충과 달리 구충제로도 잘 죽지 않고, 인간에게도 얼마든지 기생이 가능해요. 편의상 벌레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개체로서의 특징은 균과 비슷해요.』

........?

『또한 유디르의 행동양식은 좀비개미를 만드는 걸로 한때 화제가 됐던 ‘오피오코디셉스’와 그 방식이 비슷한데, 인간의 사체에 들어갔을 경우 숙주 내에 유사신경을 만들어 숙주의 몸을 지배하고, 영양분을 얻어내기 위해 식욕, 성욕 같은 보다 근본적인 욕구를 증가시켜요.』

아니, 잠깐만

아니, 잠깐만,

아니, 잠깐만!

무슨 말인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데?!

라고 문자를 보냈다. 나를 이토록 혼란스럽게 만드는 머릿속의 흔들림이 먼지가 수북이 쌓인 철도를 달려야하는 지하철의 흔들림이라고 믿고 싶다

『제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연가시를 생각해보세요. 연가시가 숙주의 뇌에 작용하는 신경전달물질을 분비하여, 우울증을 유발시켜 숙주를 물가로 가서 자살하게 만든다면 숙주의 신경계통을 지배하는 유디르는 그 상위 종인 거죠.』

이 여자 뭔가 제대로 착각하고 있다.

『아니, 그 유디르인가 뭔가 하는 벌레의 행동방식이 이해가 안 된다는 게 아니야! 언제, 왜, 어떻게, 무엇 때문에 내가 그 벌레에 감염되었는지가 이해가 안 간다는 거야!』

애초에 그 벌레가 있기는 한거냐? 라고 물어보고 싶지만, 이건 의미 없는 질문이다.

설사 상대가 있다라고 말해도 확인 할 방법이 없으니,

내가 기생충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거라곤 어릴 때 먹었던 회충약이 꽤 맛있었다는 것뿐이다. 고로 그 벌레가 진짜로 존재한다는 가정 하에 질문하기로 했다.

『보통, 유디르는 인공적으로 주입하지 않는 이상, 1차 감염자와의 신체적 접촉으로 전이되는데, 이것이 사실상 무의미 한 것이, 피부감염 된다고는 하지만 개체적으로는 그렇게 생존력이 강한편이 아니라서 피부상재균에 의해서 대부분 제거되고 말아요. 따라서 수혈이나, 성행위, 혹은 상처 부위를 통해서 밖에 감염이 되지 않습니다.』

상처부위? 설마........

주마등이 스치듯이 맹렬한 속도로 어제의 기억이 머리를 지나간다.

『그리고 유디르가 이하의 경로로 살아있는 인간의 체내로 진입했을 경우, 신경이 찢어발겨지는 듯한 끔찍한 고통과 함께 체내에서 발작을 일으켜 숙주는 70시간 이내에 사망해요.』

그러니까,

요컨데 미별하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네 말은 우리가 어제 부딪혔을 때, 네가 나한테 따귀를 날려서,생긴 상처 때문에 내가 그 유디르인가 뭔가 하는 거에 감염되었다. 이 말이냐?』

당황한 나머지 선배의 위엄이고 뭐고 없는 말투였다.

『네』

『그래서 나는 70시간 이내에 그 놈이 발작을 일으켜서 죽는 거고? 그것도 끔찍한 고통과 함께?』

『네』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였다.

『그럼 나한테 그 이상한 벌레를 전염 시킨 너는 뭔데? 인간인거냐? 아니면 벌레인거냐? 그것도 아니라면 좀비라도 되는 거냐?』

내가 생각해봐도 꽤나 핵심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미별하의 설명에 따르면 살아있는 인간에게 그 벌레가 기생하면 죽는다. 시체에 기생했다면 이미 죽어있는 거니 지금의 그녀는 벌레가 움직이는 것에 불과하다. 고로 어떤 방식으로든 설명하고 있는 미별하 본인이 자신의 설명에 모순된 존재라는 것이다.

나는 속으로 승리의 기쁨에 도취해 어디 설명해볼 테면 해보라는 식으로 그녀의 장황한 설명을 기대했지만 돌아온 문자는

『저는, 특별해요.』

그게 다였다.

이런 거지, 설정의 구멍이 드러나기 시작하면 제작자는 특별하다느니 열외라느니 같은 소리를 하며 얼버무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설정의 구멍을 드러냈으면서도 뻔뻔하게도 미별하는 또 다시 문자를 보내왔다.

『믿어주시는 건가요?』

믿어주는 거냐고? 너라면 믿겠냐?!

나도 모르게 지하철 안에서 소리칠 뻔했다. 공공장소에서 소음 및, 민폐를 끼칠만한 행동을 하면 안 되는 것은 초등학생도 아는 상식이다.

알겠니, 별하야? 이런 게 상식이라고

『믿어주셔야만 해요.』

또 다시 내 생각을 읽은 듯 미별하의 문자가 도착했다.

후우, 이래서 픽션이 지나치다고 하는 것이다.

뭐, 유사신경? 시체에 기생해 몸을 조종한다고? 그게 뭐야, 한마디로 좀비잖아? 삼류소설에도 안 나올 법한 어설픈 설정가지고 나를 농락하려 하다니 100년은 이르다.

이럴 때 답은 뭐다?

나는 메뉴에 들어가 수신거부 목록을 클릭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수신거부할 번호는 미별하의 번호였다.

내가 가슴을 만져서 머리가 저렇게 된 게 아니라면, 미별하의 망상벽은 정도가 지나치다. 그런 허황된 이야기를 만들어내든 뭘 하든 내 알바가 아니지만, 제발 타인에게 민폐를 끼치지는 말란 말이다.





006



파란만장했던 등교시간이 끝나고 나는 교실에 도착했다. 이상한 망상녀와 만나지 않도록 모퉁이를 돌때 항상 주의하며 조심스레 복도를 걸어 다녔다.

정말이지 민폐라고.

나는 교실에 도착하자마자 뱀이 허물이라도 벗듯, 가방을 책상에다 내려놓았다. 그러고 보니 앞자리에 먼저 앉아 있어야할 K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별일이네 그림으로 그려놓은 듯한 그 모범생이 나보다 늦게 오다니.

할 수 없이 쪽지 시험을 위해 외워야할 영단어장을 서랍 밑에서 꺼내드는 데,

강렬한 시선이 뒤에서부터 느껴졌다.

뒤를 돌아본다. 내 고개가 돌아가는 그 타이밍에 맞춰, 휙 하고 한 박자 빠르게 고개를 돌리는 이가 있었으니,

서리나였다.

서리한이었다. 얼굴은 곱상하게 생겼지만 눈매가 더러운 여자였다.

뭘 모르는 척하는 거냐? 내 뒷통수를 사정없이 째려보고 있던 건 너였잖아.

내가 빤히 쳐다보자, 서리나는 식은땀을 흘리듯 당황하며 곁눈질로 흘끔 쳐다보기를 반복한다. 뭐냐 대체,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란 말이지

갑자기 짜증이 돋기 시작했다. 무시하고 영어단어를 외우도록하자. 라고 생각하며 책상을 계속해서 뒤지는데 툭, 하고 편지봉투 같은 것이 내 서랍에서 떨어졌다.

아니 명백한 편지봉투였다. 게다가 러블리하게도 하트로 된 스티커로 밀봉이 되어있는 편지 봉투였다.

뭐냐 이거, 러브레터?

왠지 모르겠지만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일단 상황을 파악한 뒤 다급하게 편지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해 보았다. 그러자 거기에는 화려하기 짝이 없는 붓글씨로, ‘옥상으로 올라와라’ 라고 써져있었다.

훗, 고맙구나. 나의 환상을 부셔줘서 답례로 옥상에 누가 기다리고 있던 보자마자 선빵을 갈겨주마 기다리고 있어라.

분기탱천한 각오로 옥상으로 향했다.

우리학교는 전부해서 4층으로 되어있는데, 1층은 교무실 기타등등의 교사들의 공간이고 2,3,4층이 학생들의 공간으로, 서열이 높은 학년이 오가기 쉬운 아래층을 갖는 매우 합리적인 시스템으로 반이 배치되어 있다.

고로 고2인 나의 교실은 3층, 서둘러서 4층으로 올라간다.

그런데 학교 옥상이 학생한테 개방되던가?

옥상으로 나가는 문 앞에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럴 리가 없지, 옥상이 학생한테 개방되어봤자 몰래 담배 피러오거나, 땡땡이치거나,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이라는 우울한 현실을 이기지 못하고 하늘을 향해 다이브 치는 것 밖에 더하겠는가?

하지만 열려있었다. 문고리를 돌리자 찰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상쾌한 바람이 문틈사이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앞에는 새하얀 패딩 자켓을 입은 금발 머리의 미소녀가, 흩날리는 바람에 머릿결을 휘날리며 자신감에 가득 찬 얼굴로 서 있었다.

팔짱을 낀 채로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여주 여씨 금모낭랑(金毛娘狼) 여여진이다.”

“........음모, 뭐?”

자신이 생각해도 얼빠진 목소리였다. 만나자마자 죽빵을 갈겨줄라 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어리둥절이다.

“금! 모! 음모는 네 가랑이 사이에 난 것이니라.”

바로 정신이 돌아왔다. 그보다 여자가 그런 말을 하면 못 씁니다.

“어디를 못 쓴단 말이냐? 음탕한 녀석이로고.......”

“그렇게 받아 칠 줄이야!”

회심의 각도로 떨어지는 커브볼을 골프스윙으로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명찰 색깔을 확인한다. 색깔은 파란색으로 3학년 선배였다. 특별활동은 귀가부로 동아리도 불참해서 선배를 만날 턱이 없는 나에게는 3학년이란 전혀 면식이 없는 관계였다.

고로 나는 저 여선배가 이런 웃기지도 않는 장난으로 불러냈는지를 도저히 모르겠다.

“이거, 선배가 쓰신 건가요?”

분노로 찢어발길 뻔한 종이봉투를 주머니에서 꺼내든다.

“제법 위트 넘치는 편지가 아니었더냐?”

위트가 차고 넘쳐서 난생 처음 보는 선배를 히트할 뻔했습니다.

“용건이 없다면 그만 가보고 싶은데요?”

최대한 쌀쌀맞은 태도로 말했다.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영어단어 외울 시간이 적어지기 때문이다. 선배도 그것을 눈치 챈 듯,

“좋다. 나도 길게 말하는 것을 싫어하니 본론을 말하지”

라고 말했다.

“너는 어디 속(屬)이지?”

라고도 말했다.

속? 속이 뭐지? 소속의 줄임말인가? 그러니까 반이 어디인지를 묻고 있는 건가?

“그러니까....... 같은 고등학교의 2학년 X반입니다만”

그렇게 대답하자 선배는 오히려 자신이 더 모르겠다는 식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상한 녀석이로고? 도대체 어디 속이 길래, 망월의 밤중에는 늑대의 소굴로 들어오지 말라는 말도 못 들었느냐? 라고 묻고 있는 거다. 하마터면 죽일 뻔하지 않았느냐?”

라고 이제는 더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였다.

죽일 뻔했다고? 누가?

“내가”

누구를?

“너를”

어떻게?

“앙! 하고 깨물었느니라 망월에는 피가 끓어올라서 말이지 야하하하”

불시에 허를 찔렸다.

제기랄, 앙! 할 때 너무 귀엽잖아. 이 여자

가 아니라 침착하자 뭔가 자꾸 이 선배의 페이스에 휘둘리고 있다. 명경지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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