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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 3급 매니저, 치유담당 초파랑
  • 2급 매니저, 여동생담당 우연하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신선도(가제)
글쓴이: 이카레스
작성일: 12-10-31 23:18 조회: 2,336 추천: 0 비추천: 0

나긋나긋한 날씨다. 평화롭고 게을러지고 싶은 마음이 가득히 드는 봄이었다. 굉장히 따스하고 부드럽다. 이런 날씨가 있다가는 전 세계 사람들이 춘곤증에 빠져 세상이 멸망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다. 뭐 노근하니까 그 정도야 물론 감수해야겠지. 나는 그렇게 쓸데없는 걱정거리를 저 멀리 던져버리고 내 무릎에서 곤히 자고 있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우으으….”짧은 신음이 세어 나왔다. 입맛을 다시고 다시 잠을 청하는 그녀. 이런 말을 하면 아청법에 걸리지나 않을까 걱정되지만 그녀는 굉장히 귀엽고 사랑스럽다. 밤이 되지 않았어도 달빛을 머금은 은색의 허리까지 쭉 뻗은 머리카락. 새액새액 아기가 잘 때 내는 숨소리를 가진 오똑한 코와 굳게 앙 다문 앵두 같은 입술이 돋보이는 아름다움을 가진 그녀였다. 그녀는 집에서 돌아오자마자 이때까지의 일이 무척이나 피곤했는지 나를 억지로 소파에 앉히고 자기는 내 무릎을 베개인 양 머리를 베고 빠르게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세계멸망의 위기에 발을 한 발짝 들여놓은 그녀를 깨우기를 소망하듯 앞에서는 또 다른 누군가가 노트북을 거칠게 두드리고 있었다. 키보드를 거칠게 다루는 걸 보니 지금은 그녀가 사랑하는 미미짱은 만나지 않는 것 같은데. 무언가라도 하고 있는 걸까. 노트북을 들고 있는 그녀가 미연시를 제외하고는 다른 업무를 하는 것은 거의 본 적이 없다. 인터넷 연결조차 하지 않고 미연시만 가득 다운받아 놓은 노트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아직 확인 작업 같은 건 안 해봤으니 모르는 일이지만. 노트북 위로는 그녀의 황갈색의 바보털이 위에서 안태나처럼 뱅뱅 돌고 있었다. 그녀는 타탁! 하고 거세게 엔터로 끝맺음을 맺었는지 손이 노트북 옆으로 멋들어지게 나와 있었다.

“흐음, 그래서?”

“그래서, 라뇨?”

“이때까지 있었던 일을 보고 해야 될 것 아냐?”

그녀는 노트북에서 얼굴을 빼꼼히 내밀어 손가락으로 노트북의 윗부분을 살짝 튕겼다. 기다란 속눈썹에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검은 눈동자가 그녀의 불만스러운 눈빛을 노트북 위에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보고고 자시고 그런 건 왜 쓰시는 건데요?”“그 아이는 내 아이잖아? 부모가 자식의 성장일기를 쓴다는 데 뭐 문제 있어?”

그녀는 노트북에 몸을 숨긴 채 짧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내밀어 내 무릎 위에서 곤히 자고 있는 소녀를 가리켰다.

“근데 당신은 남편도 없잖아요.”

“하지만 키우는 건 내가 키웠잖아.”

“당신 같은 히키코모리가 애를 키우니까 얘가 이렇게 됐잖아요. 반성 좀 하세요.”

그녀는 노트북 화면을 내 쪽으로 돌렸다. 기분이 나쁠 정도로 노골적인 비웃음을 담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한 쪽 입 꼬리만 올라간 것이 꼭 힛 하고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낼 것만 같았다. 모니터에 있는 얼굴의 형태는 미간 아랫부분인 코의 가장 윗부분이었고 모니터 위에는 화면 얼굴에서 잘린 눈을 그녀의 야릿한 눈초리가 대신하고 있었다. 좋은 구경했다는 중년 아저씨의 눈초리였다.

“그렇게 됐으니까 좋은 것 아냐, 히히힛. 안 그래? 학생.”

“조, 좋긴 무슨. 곤란하기만 했다고요. 그리고 당신도 지금은 학생신분이잖아요. 적어도.”

“어허, 이 아저씨한테 거짓말하면 못 써요. 이 아저씬 다 알고 있어요. 보나마나 그 애랑 으흣 앗흥 같은 짓거릴 했겠지? 으흐흠?”

“누가 아저씨입니까. 그리고 그렇게 리얼하게 소리 내지마세요.”

“괜찮아. 어차피 이 리얼한 신음도 그 아이의 신음소리니까.”

“그러니까 문제라고요!… 예?”

그녀는 노트북 화면을 다시 돌리고 얼굴을 숨겼다.

“왜 그렇게 당황해? 내 딸의 신음이라구. 내 딸의, 신음.”

“시, 시끄러워요. 두 번 말하지 마요. 도대체 무슨 소릴.”

“괜찮아, 괜찮아. 그 아이가 처녀인 건 확인했으니까.”

노트북 위로 손을 올려서는 파리를 내쫒는 시늉을 하듯 손은 휘휘 저었다. 정말 딸이 맞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은 도대체 딸한테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겁니까!?”“그렇게 내 딸한테 하는 행동이 마음에 안 들고 믿기질 않으면 직접 확인해볼래? 지금 나는 당장이라도 저 창문을 깨부수고 나갈 의사가 있는데.”

그녀에게 말대꾸를 하려다가 황당하고 어이없는 그녀의 말에 하려던 말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을 내쉬니 자연스레 내 무릎위에서 자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이 시장 북새통 같은 곳에서 자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놀라울 따름이다. 그녀의 얼굴을 보자 갑자기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왠지 모를 부끄러움에 가슴이 요동쳤고 머릿속은 이것저것으로 잡다한 생각들에 둘러싸여 복잡해졌다.

“지금은 아침이 아니니까 활발한 성적 욕구는 자제했음 하는데 말이지.”

“그런 거 아니거든요! 멋대로 상상하지 말아주세요!”

“그럼 지금 확인해 봐도 돼?”

나는 그대로 말문을 닫았다. 그녀가 의사를 물을 때면 할 수 있다면 하고 싶다는 간접적인 표현이었다. 그녀는 노트북 위로 나의 붉어진 얼굴을 보더니 큭큭큭 하고 기계적인 웃음을 흘렸다.

“알았어, 알았어. 장난은 그만할 테니까 얼른 보고나 해.”

“보고하기 싫다면요?”

“그럼 당장이라도 네 머릿속을 헤집어주지. 물론 중2때의 흑역사까지 모두 들춰내는 건 옵션보단 필수사항이겠지?”입에서는 중2라는 말에 무의식적으로 신음을 흘렸다. 다시는 생각하기도 싫은 기억들. 인생을 살며 창피한 일을 절반은 거기에 쏟아 부은 것만 같은 시절이었다. 검을 들고 의미 불명인 주문을 늘어놓으면 멋져 보이기만 했던 그 당시. 그 시절만큼은 절대로 봉인하고 싶은 기억이었다.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그러면 기억, 들추지 않는 거 맞죠? 믿어도 되요?”

“물론이지. 난 약속하나는 잘 지킨다구. 나만 알고 있도록 하지.”

“이미 들췄잖아요!”

“아아아! 미안하군 이거야 말로 네 운명의 데스티니 YEEEEEEEEEE! 그때의 복잡한 술식과 주문을 고민하던 너의 복잡한 머릿속은 그야말로 혼돈의 카오스! 너, 무서운 녀석!”

“죄송합니다. 살려주세요.”

죽 고 싶 다.

“자자, 그럼 네 보고를 듣도록 할까. 어떤 게 좋으려나~.”

그녀는 작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더니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그래, 그래. 첫인상! 첫인상을 듣고 싶어. 어땠어?”

그녀는 옆으로 손을 파닥파닥 털었다. 손 풀기 운동이었다.

“음…. 뭐랄까요. 괴물 같다고 해야 하나. 적어도 이게 사람이라는 생각은 안 들었어요.”

“그렇군. ‘나는 인간이 아니다.’ 인가.”

“아니죠! 왜 ‘나는 인간이 아니다.’ 입니까!? 일인칭이잖아요. 보고하는 건 저 아닙니까. 전 인간이라고요. 보다시피.”

“그 녀석도 보다시피 인간‘모습’인데.”

그녀 말하는 그 녀석이라는 건 그녀의 딸이자 내 무릎 위에서 자고 있는 그녀를 가리켰다.

“모습이 아니라 힘. 근력 말이에요. 저를 몸통박치기로 뛰어서는 5분이나 되는 거리까지 달리다니. 전 차저가 달려오는 줄로만 알았다고요.”

“아, 그 외팔이 좀비 말이지?”“팔 둘 다 있거든요. 조그맣고 퍼덕거려서 그렇지.”

“어찌됐든 신선하잖아! 입에 식빵을 물고 남학생한테 돌격! 하늘도 뚫을 듯 한 일격-!”

“방금 일격이랬죠!? 공격이잖아요!”

“됐어. 시끄럽고.”

무시당했다.

“난 식상한 건 싫거든. ‘지각이다 지각, 쿵, 앗! 아앗! 딸기팬티! 변태!’ 같은 것 말이야. 되도록이면 식상한 것도 신선하게 바꿔줘야지.”

“그 신선한 거 역시 당신이 가르쳤군요.”

“식상한 걸 하다간 경찰한테 잡혀간다고. 그 남학생이.”

“예? 그 남학생도 고의적으로 본 것도 아니고 오히려 달려오던 그 여학생 측이 잘못한 게 아닐까요?”

“꿈이라는 건 말이야. 원래 질투 받고 희생이 따르는 거야.”

“그게 무슨….”

“그 꿈. 품고 있었거든…, 경찰관이.”

“꿈 때문에 죄 없는 사람을 잡아간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누구냐 그 경찰관!”

“나이 43세 이름 스노미야 이제 말년으로 올해 퇴직해.”

“늙었잖아요! 그 중년 아저씨 너무 어린 꿈을 꾸고 있어요. 당장 가서 말려야 해요! 그것보다 왜 스노미야 입니까?”

“좀 전에 게임하는 데 히로인을 도구가지고 농락하는 청년의 성이었어. 거기서 따왔지.”“당장 일본으로 날아가서 사과하세요. ‘스노미야’라는 성을 가진 사람한테.”

“응, 방금 사과했어.”

“뇌로 수신하지 말라니까요. 혼자 있을 때 들리면 무섭다고요.”

“괜찮아. 난 안 무섭거든.”그녀는 계속해서 글을 쓰는 와중인지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신랄하게 울렸다.

“그럼 대충 프롤로그는 썼고. 이제 챕터 1을 적어야 할 차례니까 어서 보고 시작해.”

“하기 싫…다고 하면 또 협박할꺼죠? 하아…. 어디서부터요?”

“아침에 일어나서 ‘하아암’하며 등교하는 장면부터.”

“예? 그런 장면 없었는데요.”

“그럼 그건 내가 알아서 집어넣은 테니까. 일단 시작해.”

“예예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남자는 3번 놀랄 때가 있다. 첫 번째는 남자 중학교에서 고등학교에 올라왔을 때 옆자리에 있는 여자를 보고 놀라고. 두 번째는 옆 자리에 있는 여자의 집에 초대받아서 놀러갔더니 그녀의 엄마를 보고 놀라고. 세 번째는 그 두 분이 결코 인간이 아니라는 것에 놀란다.-나 (장훈범) -

“으아아아아악!”

비명이 힘껏 세어 나온다. 내지 않으면 공포감에 갇혀버릴 정도로 나는 날아가고 있다. 아니 누군가가 나를 업고 달리는 셈이다. 그녀는 나를 들이받고 그대로 쭈욱 달렸다. 그리고 그 상태로 나는 기절했고 지금은 업힌 채로 어디까지 날아갔는지 모르겠다. 지금 내게 보이는 건 쉴 세 없이 바뀌는 배경뿐이다. 뒤쪽은 보지 못한 채 중압감에 시달려 양 팔과 다리를 앞쪽으로 내밀었다. 도저히 내 자력으로는 사지를 제자리로 돌려놓지 못했다. 그러니까 지금 무서워 죽겠습니다. 어째서 내가 그녀에게 들이 받혔는지. 어째서 내가 이렇게 날아가야만 되는지. 이유도 모른 채 이렇게 끌려가니 이 보다 무서운 것 없는 것 같다. 내가 무언가라도 잘못한 걸까. 날아가는 동안. 지금이라도 생각해보자 내가 그녀에게 뭘 잘못했는지.

나는 오늘 아침에 엄마가 대충 차려놓은 아침밥을 내 여동생과 같이 먹은 다음에 집을 나왔다. 평범했다.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여동생과 반찬투정으로 싸우며 시끌벅적하게 밥을 먹었다. 그리고 난 뒤에는 가방을 챙기고 집을 나왔다. 역시 평범했다. 그저 한 일이라고는 여기저기서 달콤하게 풍겨오는 아침밥의 냄새를 맡았다. 그 후에 곧바로 그녀에게 부딪혔다.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나와 부딪히기 전에 그녀는 나와 같은 대진 고등학교의 교복을 입고 있었고 입에는 토스트를 물고 분명 “지각!”이라고 외친 것 같았다. 물론 내가 학교를 가기위해서 집에서 나오는 시간은 6시 30분이다. 절대로 지각이라는 단어가 입에서 나오지 않을 정도의 시간이었다. 나는 다시 생각을 되짚어 봤지만 역시 그 그물에는 걸려서 나오는 게 단 하나도 없었다.

“으아아아아악!”

아니면 좀 더 뒤로 가보자. 입학식을 마칠 때. 평범했다. 그저 처음으로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올라오면서 여학생들을 보고 넋을 놓았을 뿐이다. 학원에서는 사복 차림의 여학생만 봐서 그런지 교복을 입은 학교의 여학생을 보니 신선한 느낌이 들어 그렇게 멍 때린 것뿐이었다. 그것이 문제인건가. 아니면 이번에는 좀 앞으로 가서 내 옆자리에 있는 여자애랑 이야기했다. 이건 좀 평범하지 않았다. 그것도 오른쪽. 내게 먼저 손을 내밀며 인사해왔다. 기뻤다. 눈물이 흐르고 입에서는 감탄사를 흘리며 두 손을 모으고 감사하다고 누군가에게 마음속으로 외쳤던 것 같았다. 이게 문제인건가. 이번에는 좀 더 앞으로 가보자. 자기소개가 끝나고 종례를 마친 다음에 집으로 향했다. 평범했다. 발걸음을 옮기며 자연스럽게 여학생들에게 눈길이 돌아갔다. 친구랑 여학생의 외모나 그 외의 잡다한 것들을 얘기하며 갔다. 몸무게라던가 이거라던가 저거라던가. 남학생들만 알고 있는 그런 얘기들 말이다. 그게 문제인건가. 그 부분을 들었던 여학생이 지금 내게 복수를 하려고 지금 이렇게 아침 일찍 나와서 이러는 걸까. 나는 마음속으로 죄송하다고 지금도 사죄하고 있다. 비명을 지르고 정신이 없는 이 상황에서도 머리가 돌아가는 걸 보면 나도 정상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나를 매달고 달리는 그녀에게 사죄했다. 말로만 못할 뿐이지. 죄송합니다. 절대로 당신에게 말한 게 아니에요. 가슴이 작다고 한 거. 내 사과는 아무래도 전해지지 않았는지 그녀는 아직도 달리고 있다. 바람과도 같고 한 발의 총알 같은 속도로 빠르게 달렸다. 조금만 느리게 달려준다면 내가 얘기라도 할 수 있을 텐데. 속도는 여전하다. 진짜로 도대체 얼마나 날아가려고 하는 걸까.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얘기를 하면서 내기라도 해야 할 판국이다. 그렇게 조금만 더 날아가자 그녀는 갑자기 속도를 급격히 줄이기 시작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빠르게 지나가던 배경이 시간이 멈추기라도 했는지 아예 멈춰 섰다. 더 이상은 비명을 지르지 않아도 될 정도의 풍압은 사라졌고 팔 다리도 정상으로 돌아올 것 같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던 것 같다. 이래서 나는 과학자와 수학자. 그리고 철학자가 정말 싫다. 조금이라도 법칙을 어기면 당장이라도 세계의 법칙이라는 두께 5cm 정도 되는 백과사전을 들고 와 사람을 죽일 것 같이 사는 놈들. 그리고 그 법칙을 세상은 아무런 말없이 모두 받아들인다. 그래서 관성의 법칙이란 게 생겼고 나는 지금 그 관성의 법칙이라는 것 때문에 날아간다.

“으아아아아악!”

비명을 잊을 틈이 없다.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아까 말한 대로 비명을 잠시라도 지르지 않으면 내가 죽은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나는 살 수 있도록 비명을 힘껏 질렀다. 지금 나는 날아가는 몸. 그녀의 달리기 속도는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주위의 배경이 총알같이 지나갈 정도라면 지금 내가 날아 땅에 추락하면 못하면 중상 잘하면 사망이었다.

푸욱

무언가가 내 몸을 그대로 받아들인 느낌이다. 푹신한 무언가가 포근하고 차갑다. 그리고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내 몸에 딱 맞는 거푸집 같았다. 날아가면서 질끈 감고 있던 눈을 뜨니 나는 땅에 박혀있었다. 정말로 거푸집에 들어가 있는지 땅은 내 몸에 알맞은 구덩이가 패어있다. 직접 이 두 눈으로 보고 있는 내가 이상한 게 아닐까하고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어떤 속도로 달려야 콘크리트에 이만한 구덩이가 생기면서 내가 고통을 못 느낀단 말인가. 머리가 어지럽고 세상이 빙빙 도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그녀의 얼굴은 뚜렷하게 보인다. 나를 향해서 한발 한발 다가오고 있었다. 걸어오는 그녀가 보이고 소리가 들린다.

“으… 으아악! 사, 살려주세요.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그렇지 않을게요. 제발.”

눈을 감고 팔로 머리를 감쌌다. 그리고 빌었다. 부처님 하나님 천지신명님 제발 살려달라고. 이젠 남학교에서 방금 올라온 것도 아니고 여자도 몇 번 봤으니까 더 이상은 놀리지 않겠다고 그렇게 약속하고 계속해서 빌었다.

“괜찮아?”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감정 없는 목소리가 그렇게 말했다. 세상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를 무시하듯 악센트 없는 그녀의 목소리는 무미건조했다.

“괜찮아?”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니 그녀는 내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어떤 악감정을 가지고 내게 손을 내밀었는지 나는 모르겠다. 그저 그녀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는 지금 이 상황만이 보일 뿐이다.

“저기….”그녀는 내가 말하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를 심판하러 온 정의의 사자가 아닌가. 나는 잠시 그녀를 보며 넋을 놓았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름다운 얼굴. 그녀를 보고 있자 그녀는 내게 내민 손을 흔들었다.

“안 잡을 꺼야? 혼자 일어설 수 있어?”

“아, 아뇨 자, 잡을 겁니다. 이거 못 일어서겠네요.”

말을 더듬거렸다. 긴장하지마라 나. 이때까진 여자와는 대화 몇 번 주고받지 못했지만 어제 해보지 않았는가. 난생 처음도 아닌데 왜 이렇게 긴장하는 거냐. 진정해라.

“자, 얼른 잡아.”그녀는 내게 호의를 베풀었다. 굉장히 영광스러운 손잡기라는 호의를. 처음으로 여자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나를 끌어당겼고 나는 그녀에게 끌려갔다. 그녀의 힘은 가히 천하장사급이었다. 아무런 힘도 못쓰고 있는 나를 단숨에 거푸집에서 끌어 올릴만한 힘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녀가 나를 이런 구덩이에 빠뜨렸지만 지금의 나는 그런 사소한 일 따위는 모두 잊었다. 그저 지금은 그녀가 내 앞에 있다는 것에 정신이 팔렸다. 손이 무척이나 따뜻한 그녀. 아까처럼 무식하게 달리기를 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소녀다. 굉장히 착하고 순진해 보이는 그녀였다. 일어서서 멍하니 그녀를 보고 있자 그녀의 얼굴이 내게로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천천히 천천히. 내 몸에 투욱 하고 말이다. 그녀의 키는 엄청 작았다. 기껏해야 내 복부의 명치까지 올 정도의 키였다. 그녀는 내 몸에 부딪히자 1, 2초가량 내 품에 조용히 있더니 갑자기 뭔가에 튕겨나가 듯 물고 있던 빵을 내뱉으며 날아가 넘어졌다.

“아얏… 아파.”

“에, 옛!?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갑작스럽게 넘어진 그녀에게 사죄를 하고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빌었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무미건조한 표정과 목소리로 아픈 기색 없이 손으로 엉덩이를 문질렀다. 그녀는 문지르다가 곁눈질로 다시 한 번 날 힐끗 보더니 자신의 치마를 바라봤다. 뭔가 이상한 걸까. 아니면 내가 이상한 짓이라도 한 건가.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치맛자락을 손수 말아 올리고는.

“아앗- 변태.”

다리를 조금 더 벌리고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합니까. 다시 한 번 사죄해야 하나. 아니면 지금 당장이라도 경찰을 불러야 되는 걸까. 날 잡아가세요! 하면서. 그녀는 그다지 부끄러운 기색도 보이지 않고 있다. 나는 멍하니 그녀를 지켜보다가 그녀가 치맛자락을 올리는 것을 눈으로 좇다가 보이는 딸기팬티를 확실하게 보고는 얼굴을 홱 하고 돌렸다. 마치 봐달라는 듯이 다릴 좀 더 벌리고 치마를 올렸지만 나는 그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가슴이 미칠 듯이 뛰었다. 고개를 돌렸지만 보이는 건 여전히 허공에서 아른거리는 딸기팬티였다. 지금 당장이라도 이 창피한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어째서인지 또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몸은 솔직하더라니. 스스로에게 이런 말을 할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저기.”

그녀는 어느새 일어나 내 마이의 끝자락을 잡고 내게 물었다. 나 역시 그녀를 힐끗 보고는 단정한 차림새에 얼굴을 그녀에게로 돌렸다.

“왜 말. 안 해?”

“뭐, 뭐가?”

“딸기팬티- 하고.”

처음 들어봤다. 아니 이런 대사는 원래 소녀만화에서 없지 않아?

“어…, 아니 말해주길 바라는 거야?”

“응, 엄마가 부딪힌 남학생한테서 그 말을 들어야 세상의 반을 산거라고 말하셨어.”

방금 굉장히 신랄한 말을 들은 것 같았다. 이것도 착각일까. 오늘따라 환청과 환각 그리고 환력이라는 것도 겪은 것 같다. 환력이 뭐지? 이제는 머리가 이상해 질 것만 같다.

“엄마가 남학생한테서 딸기 팬티라는 말을 듣지 못하면 지구의 자전이 멈춘댔어.”

“딸기팬티! 세상을 구할 정도로 굉장한데!”

나의 주체할 수 없는 감성이 폭발했다. 그녀에게 들은 말로는 딸기 팬티는 지구의 용사 따윈 한 방에 물리칠 것 같은 존재다.

“아, 방금 딸기팬티라고 말했어. 변태.”

무표정에 악센트나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듯 한 목소리였다.

“저…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고 오히려 리얼해서 내 마음에 상처가 될 것 같은데요.”

“응, 괜찮아. 상처란 건 많이많이 받아도 돼. 기뻐. 남에게 상처를 주게 되다니.”

“예? 그건 또 무슨….”

“상처라는 걸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기분이 좋아진다고 엄마가 그랬어.”

“요즘 부모는 그런 독특한 기호를 가르치는 존재였나요!?”

굉장한 부모다. 극히 일부밖에 되지 않는 기호를 가르치는 부모라니. 세상을 구할 정도의 딸기팬티도 준비해준 듯 한 부모이니 노벨평화상과 함께 성희롱 죄로 수갑도 같이 받아야 마땅하지 않을까.

“훈범, 훈범. 장훈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또 내 마이의 자락을 잡고 작지만 또렷이 내 이름을 불렀다. 이번에도 처음으로 여자한테 이름이 불린 건 아니었지만 역시나 영광이었다.

“으응? 왜 아니 그보다 어떻게 내 이름을 알아?”

그녀는 내 오른쪽 가슴께에 있는 명찰을 가리켰다. 내 이름 석 자가 수놓아져있는 마이에 있는 명찰이었다.

“그러니까 해줄 거지?”

뭘? 하며 되묻자 그녀는 너무나도 당연한 듯이 앞으로의 시나리오를 읊조렸다.

“오늘 나. 이 학교에 전학 와.”

그녀는 교복의 나비넥타이를 손가락으로 잡더니 고무줄로 장난치듯 자락을 몇 번 당겼다 놓았다를 반복했다.

“그러니까 내가 반에 들어가면 보고 외쳐줘.”

“딸기팬티! 하고.”

“수치 플레이를 원하는 거냐!”

순간적으로 머리가 폭발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런 발상이 나오는 지 나로서는 신기할 정도다. 머리를 쥐어뜯고 있지만 여전히 이 당황함을 어떻게 숨겨야 될지 모르겠다. 처음으로 여자와 만난 지 5분도 안 돼서 이만큼 이야기를 이어간 것도 대단하지만 이런 이야기니 더욱 황당했다. 게다가 이제는 반말도 찍찍 내뱉는 사이. 굉장히 친밀해진 기분이었다.

“엄마가….”

“그 놈의 부모가 대체 뭐길래 그렇게 성실하게 하는 거야!?”

“반을 갔으면 끝까지 가라고 어중간하면 여운이 남는다면서. 안하는 것보다 못하다 그랬어.”

“차라리 이런 상황은 안한 것보다 못한 상황이니까. 차라리 안하는 게 더 나아!”

그녀는 고개를 절래 절래 거세게 흔들었다.

“괜찮아. 민망하지 않게 확실하게 말해줄게. ‘변태’라고.”

“으아악! 날 변태로 만들 셈이냐! 학교가 개학한지 얼마나 됐다고 반 애들한테 변태로 불리고 살아야 돼?”

어느 정도 장난기라도 있으면 모를까. 아니면 처음부터 내가 그런 놈이라서 그렇게 반 애들한테 아 쟤는 저런 놈이잖아. 하고 인정받았으면 모를까. 지금 그녀가 말한 시나리오대로 간다면 난 그대로 변태로 꽂히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그녀의 목소리도 너무 리얼한 나머지 반 애들이 없는 지금도 내가 내 자신을 경멸하고 싶어졌다. 이렇게 되어버린다면 날 평범하게 이끌어 갈 고교생활은 그대로 파탄이다. 보통은 남녀공학에서도 여자에게 말을 걸지 못하겠지만.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고교생활이 아니다.

“괜찮아. 엄마는 변태가 더 좋데. 하지도 못하는 고자보다는 차라리 할 수 있는 변태가 되라고 했어.”

“내가 말하고 있는 건 그게 아냐!”처음만난 동년배의 여고생에게 변태라는 소릴 들을 정도로 나는 타락해 진 걸까. 벌써부터 절망감이 차오른다. 당장이라도 굴을 파고 거기에 들어가서 울고 싶다. 평생을 걸쳐 선생님과 부모님을 제외하고는 여자와 몇 마디 대화하지도 않았건만 벌써부터 변태취급을 받고 있다. 지금 이 상태에서 다시 그녀가 입을 연다면 나는 도대체 어떻게 될까. 일단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말하는 것을 제지시켰다. 지금은 고성방가를 하는데도 주민들이 나오지 않아서 주민 여러분께 감사하다고 마음속으로는 생각하고 있다.

“그만. 제발 그만해줘. 내 안에 잇는 무언가가 무너지려 하고 있어.”

한 손으로 욱신거리는 머리를 받치고 쭈그려 앉자 그녀는 입을 다물고서 내게 다가오더니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개를 들어 그녀를 올려다보니 그녀는 마치 천사처럼 보였다. 아름다운 천사. 내 고통을 덜어주는 그런 아름다운 천사였다. 이대로가 좋으니까 제발 입만 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알겠지?”

그녀는 내 머리를 두 번 정도 말 잘 듣는 어린애를 달래는 듯이 톡톡 치고는 내 눈높이 정도로 앉았다.

“교실로 가면 말해 줘야해.”“아직 포기 안하고 있었냐.”

“응, 포기하지 않으면 꼭 이뤄진다고 했어.”

“괜찮아. 내가 포기했으니까. 이뤄질 리가 없잖아?”

“응, 포기했으니까 순순히 내 말에 협조해줄 꺼지? 딸기팬티 봤다고 말할 거지?”“어느 곳을 가도 안하면 안 된다는 건가.”

“넌 어느 곳이라도 가고 있어. 다만 그 길의 마지막은 모두 같아.”“배를 타고 해적이 돼야할 기분이 드는데 그래.”나는 한숨을 쉬웠다. 그녀는 도저히 포기할 것 같은 느낌은 일체 내지 않았고 무덤덤한 페이스를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길 수도 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비껴나가는 것이다. 거짓말이라는 건 내가 진 것 같지만 이겼고 상대방은 이긴 것 같지만 지는 게임. 지고 들어간다. 지금은 수긍을 한 다음 교실에 가서는 말하지 않으면 된다. 세상에서 가장 간단하고 치사한 게임이었다.

“알았어, 알았다고. 하면 되는 거지?”

“정말?”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단 이 사건을 일단락 하는 것은 둘째 치고 지금은 학교를 가야했다. 몇 분이나 흘렀을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그래, 정말. 일단은 학교부터 가야할 것 아냐.”그녀는 여전히 쭈그려 앉아 나를 올려다봤다. 말해달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당연 그녀는 무표정이었지만 그녀를 보는 나는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처음 보는 거잖아? 여자가 나를 올려다보는 거.

“정말이지?”

그녀는 내 대답을 받았지만 아직도 일어설 차례가 아닌지 아직 일어서지 않았다.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열려다보는 그녀를 보니 자연스레 얼굴의 표정이 풀어진다.

“으응. 한다고 할게. 하면 될 것 아냐. 그까짓 거.”

“응, 고마워.”

나는 최대한 멋지고 터프하게 그녀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는지 말이 나오자마자 곧 바로 그녀는 자리를 털며 일어났다. 여전히 무표정. 오늘은 여자와 대화한 굉장한 수확이 있었다고 자부할 수 있다. 다만 안 좋은 경험이 있다면 여자에 대한 환상이 깨졌다는 것 정도의 페널티였다.

아침의 해프닝은 일단 어느 정도까지는 종료되었다. 6시 30분에 지각이라며 입에 빵을 물고 달리던 소녀에게 잡혀서는 걸어서 약 10분 정도나 되는 거리까지 날아갔다. 그곳에서 교실에 가면 딸기팬티라고 외치는 수치플레이하자는 그녀와의 일방적인 조약을 맺고 지금은 학교로 가기위해 등굣길에 올랐다.

“근데 넌 이름이 뭐야? 명찰도 없고.”

이 질문 말고도 여기까지 걸어오는 데 어떻게 그리 빨리 달리고 그런 무식한 힘을 가지고 있는 지 또 그 외에 많은 걸 물어봤지만 그녀에게서 들은 답변이라고는 “글세” 라는 한마디가 다였다. 모든 것을 신비에 쌓아놓고 불필요할 정도로 엄마의 말을 잘 들으며 수치심을 모르는 의문의 소녀. 만난 건 몇 분밖엔 되지 않았지만 그만큼 파악하기가 쉽고 또 어려웠다.

“내 이름?”

그녀는 자신의 가슴께를 보더니 몇 번이고 명찰이 있어야하는 부분을 매만졌다. 음. 하며 약간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갑자기 멈춰 서서 자신의 스타킹 윗부분을 뒤집었다. 지금은 시간대가 일러서 그런지 사람은 없었지만 어쨌든 스타킹을 뒤집는 게 그다지 상식적으로는 보이지는 않는다. 당황했지만 나는 재빨리 고개를 위쪽으로 돌렸다.

“뭣, 뭐하는 짓이야!?”

“자, 봐봐. 여기.”

그녀가 손으로 가리킨 곳에는 말아 올린 스타킹이었는데 그곳에는-

“-명찰이잖아?”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당혹스러웠다. 뭐라고 말을 해야 될지 고민하고 있자 그녀는 스타킹에서 명찰을 빼더니 가슴께에다가 조심스럽게 달았다.

“어째서…?”“엄마가 옷은 입지 않아도 되지만 스타킹만은 꼭 찾아서 신으라고 하셨어.”또 부모님이다. 세상을 구하는 딸기팬티에 독특한 기호. 그리고 전라로 스타킹만을 고수하는 그녀의 부모님을 한 번 쯤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빠른 시일 내에 네 엄마라는 사람 좀 만나봤으면 좋겠다.”그녀는 알아듣기는 했는지 응 하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는 내게로 쪼르르 달려왔다. 나를 향해 쪼르르 달려오는 모습을 보니 어린 사촌동생과 나들이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아침의 해프닝이 완전히 끝나고 그 이후에는 등굣길 도중에 그녀가 말을 꺼내는 일은 없었다. 내 쪽에서는 왜 나를 들이받았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녀가 침묵함에 따라 나도 입을 다물었다. 드디어 길고 긴 등굣길이 끝났고 이제는 그녀와 이별할 시간이었다.

“여기야. 대진 고등학교. 뭐 전학 수속 밟을 때 와 봤으려나.”

“아니, 엄마가 전학 수속을 밟은 걸로 처리해줬어.”

그녀에게서 ‘밟은 걸로’라고 약간 수상한 말이 들렸지만 일단 패스.

“그럼 교무실로 가는 길도 모르겠네. 교무실로 가려면 왼쪽에 있는 건물 있지? 거기서 2층 안쪽으로 들어가면 있을 거야. 그럼 난 이만 가볼 테니까.”그녀에게 힘을 내라는 메시지가 담긴 손을 흔들어주고는 뒤돌아서 다시는 그녀의 모습을 보지 않고 그나마 정상인들이 모여 있는 내 학급을 향해 똑바로 달렸다. 그저 모든 여자의 환상이 그녀처럼 깨지지만 않기를 빌었다.

“응, 엄마?”

그녀는 그가 달려가는 모습을 보며 누군가에게 답했다. 그녀는 전기로 회선을 연결시켜 통화할 수 있는 휴대폰을 손에 들고 있지도 않았고 귀 역시 이어폰 같은 기계적인 물건은 착용하고 있지 않았다. 통화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 허공을 향해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얘기하고 있었다.

“아니, 응 엄마. 엄마가 말 한대로 좋은 애야.”

우뚝 서 있던 그녀도 그가 알려준 대로 착실히 왼쪽 건물로 발을 옮겼다.

“걔도 엄마 못지않게 빨리 엄말 만나고 싶어 해.”

봄바람이 거칠게 불었다. 그녀의 은발이 나부끼며 그녀의 명찰을 한 번 쓰다듬고 지나갔다. 이채림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명찰을.

나는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 그대로 앉아 가방에 머리를 파묻었다. 오늘 아침에는 차마 내 입으로는 열 개가 있어도 설명하지 못할 해프닝이 있었고 그 해프닝은 머리에서 정리되기는커녕 오히려 골치 아픈 문제를 안은 채 머릿속에서 버티고 있었다. 도저히 떠나갈 기미가 안 보인다. 해프닝을 잊을 만하면 딸기팬티가. 머릴 흔들어 지우면 여자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것이 악순환 되어 계속해서 피드백을 요청했다. 다시 한 번 머리를 쥐어뜯었다. 탈모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얼굴을 파묻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일단은 친구가 몇 없는 바람에 같이 시간을 때울만한 사람도 찾지 못한 채 그저 조례시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학급의 인원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특히 종치기 2분 전의 상황은 더했다. 문턱을 잡은 최후의 학생을 끝으로 조례종이 울렸다. 종이 울렸지만 좀 지나도 선생님이 들어오지 않았고 애들은 그 틈을 타 그룹을 몇몇 만들어서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애들의 얘기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멈출 줄 모르고 계속해서 목소리만 높아져갔다. 쉬는 시간이라도 보는 듯 목소리가 최고조로 달하자 갑자기 앞문에서 쿵쿵하고 노크해왔다. 그러자 모두가 일제히 침묵했다.

“그럼 노크도 했으니 들어갑니다.”문이 중후한 목소리로 정중하게 안부를 묻고는 드르륵 하고 문이 열렸다. 그곳에서는 3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담임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로 들어왔다. 매번 저런 모습이다.

“아, 에… 뭐더라…. 오늘 갑작스럽게도 전학생이 왔어요. 그래 이 말을 하려고 했네요.”

선생님은 몇 번이나 헛기침을 하시더니 말을 이었다.

“외국에서 온 귀국자녀라니까 조심스럽고 친절하게 대해주세요. 잘 모르는 게 있으면 친절하게 가르쳐 주시고요.”

반 전체가 술렁거렸다. 언제 어디든 전학생이 온다면 궁금해 하고 어떤 애일지 서로의 정보를 모아 전학생을 괴물 같은 스팩으로 만드는 건 기본이었다. 그리고 우리 반도 그 다른 이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외모를 이야기하는 그룹이나 고상한 이미지를 그리는 그룹. 또는 한 발짝도 양보할 수 없다며 자신이 말한 이미지를 고수하며 싸우는 그룹도 있었다. 결론은 모두들 외모로 통한다는 점이다.

“자자, 모두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시고, 들어오세요.”선생님의 부탁에도 이야기는 끊이질 않았다. 나는 그저 그 사이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가끔 웃기만 할 뿐 그저 가만히 있었다. 그때 선생님의 호령에 약간 늦게 문이 반응했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문으로 집중되고 정숙하자 그 전학생은 은발의 머리칼을 나부끼며 짧은 다리로 힘차게 들어왔다. 결전의 시간이었다. 그녀가 내게 수치 플레이를 부탁한 시간. 하지만 난 할 생각이 전혀 없다. 나는 그녀와 친해지는 것도 물론 중요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녀도 한 명의 여자였고 우리 반의 급우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변태가 되어서라도 그렇게 되는 일은 없었으면 했다. 조용히 입을 다물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다 말고 나와 눈이라도 마주쳤는지 그녀는 내가 있는 곳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말해줘.”

그녀의 한 마디에 모두가 술렁거렸다. 무슨 뜻일지 아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니까. 나는 가만히 그녀가 어떤 말을 할 지가 기다려졌다.

“훈범, 장훈범.”

범인이 너무 빨리 밝혀졌다. 증거도 모두 밝혀지지 않은 채로 말이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쏠리고 술렁거림이 멎었다. 굉장한 파괴력이다. 내 이름이 이렇게나 유명했다니 나도 놀랐지만 모두 범인이 나라는 것에 놀란 눈치였다. 그렇다고 해서 술술 불어버릴 내가 아니다. 나는 평범하게 살고 싶으니까. 그렇게 결심한 건 중학교 2학년을 벗어나고부터였고 그리고 이제 막 평범한 일상을 지내려는 나는 그런 일을 할 리가 없다.

“얼른 말해줘. 딸기팬티.”

그녀는 마지막 폭탄을 투하했다. 이제는 떨어질 폭탄을 예측해서 악마군의 장군이 가지고 있는 시계를 부수기만 하면 된다.

“어이! 부끄럽지도 않아!?”

나는 그녀의 말에 결국에 감정이 폭발했다. 풍부한 감성은 주체하질 못했고 내 머리로는 이해 못할 단어가 그녀의 입에서 나왔다.

“하지만 말하질 않잖아. 딸기팬티.”“뭔가요. 뭔가요. 두 분 아는 사이었습니까?”

“아뇨, 절대 모르죠. 알 리가 있습니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딸기팬티.를 말하는 사이에요.”

그녀의 단 다섯 마디에 아침조례는 상상도 못할 정도의 광대한 범위에서 폭탄이 터졌고 그 여파가 몇 번인가 터진 다음에야 조례가 끝났다. 못들은 걸로 해주겠다는 담임선생님은 재빠르게 교실을 나갔고 내 옆자리에 앉은 귀국자녀 분께서는 나를 뚫을 기세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늘 그렇듯 반 애들이 몰려들었는데 개중에 반은 내게 무슨 일 있었냐며 호기심을 표했고 반은 나를 두고 이상한 상상이라도 벌였는지 나를 피해 그녀에게 다가갔다. 마치 파벌로 갈린 듯한 기분이 든다. 이런 식으로 나와 그녀를 취조하듯 하는 반애들 때문에 토요일의 3교시 수업은 물 흐르듯 빠르게 지나갔다. 아, 게다가 특이하고 독특한 별명이 생겼다. 딸기팬티 라고.

“그럼, 딸기팬티 먼저 가볼게.”나는 먼저 간다는 몇 안 되는 친구 놈 중 한 녀석에게 오늘 막 지어진 따끈따끈한 별명을 들으며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이 녀석들은 딸기팬티가 무언가를 말하는 묘한 비밀단어라고 생각했는지. 나를 딸기팬티. 그리고 그녀를 딸기라고 불렀다. 차라리 나를 팬티라고 부르라고. 아니 더 이상한가.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처음에 변태라고 궁지에 몰릴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딸기팬티라고 말을 하라니. 그녀의 말을 듣고 그렇게 별명이 정해지나 싶었다. 하지만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고 그녀와 나의 사이에 비밀단어라고 생각했는지 나를 딸기팬티라고 불렀다. 나도 처음에는 변태보다는 나은 별명이겠지 하고 나름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몇 번 곱씹어본 결과 최악이었다. 차라리 변태 쪽이 더 나은 것 같다. 딸기팬티가 뭐야. 마치 내가 딸기팬티를 입은 황금갑옷의 마계마을의 아저씨 같잖아. 깊게 한 숨을 쉬며 마지막으로 반을 나와 문을 잠그고 돌아갈 찰나였다.

“훈범, 훈범, 장훈범.”

오늘 전학 온 귀국자녀 분께서는 내게 호감이라도 가지고 있는 건지 텅 빈 2학년 통로에서 홀로 서있었다. 기뻐서 눈물이 나고 미쳐서 날뛰고 싶은 심정이었다.

“문, 제대로 잠궜어?”

“응, 확실하게.”

나는 그녀에게 열쇠를 보여준 뒤 문 위에 있는 창틀로 열쇠를 던졌다.

“그럼 오늘 할 일 끝났어?”

응,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친구랑 놀러갈 약속 같은 거. 있어?”

“없는데?”

“친구가?”

“있어!”

“약속이?”

“친구가 있다고!”

그녀는 으응 하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런 건 얘기하기 전에 생각해놓으라고. 태클을 걸고 싶었지만 지금은 많은 애들과 친해지고 싶기 때문에 일단은 태클은 삼갔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그럼 볼 일 없으면 나 먼저 가본다?”

그녀의 옆으로 빠져나가려고 하자 그녀가 갑자기 내 마이의 끝자락을 잡고 고개를 뒤로 돌렸다.

“생각하는 중이니까. 가지마. 딸기팬티.”

“딸기팬티는 내가 아니라 너야! 너 때문에 내가 오해받았다고!”

“딸기팬티 입은 거, 혹시 들통난거야?”

“안 입었어! 그런 건 애초에 가지고 있지도 않아! 딸기팬티를 입고 다니는 황금갑옷 아저씨가 아니라고 난!”

“그럼 왜 나 때문이야?”

“네가 입었잖아. 말해달라고 네가 부탁까지 했잖아.”“나? 안 입었어.”

뭐? 하고 묻기도 전에 그녀는 갑자기 치마를 들췄다. 검은 색. 다양하고 셀 수 없이 많은 프릴이 달린 섹시한 팬티였다.

“어째서…가 아니라 얼른 내려, 부끄럽지도 않냐.”

이번에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것에 고개를 돌려봐야 어차피 보는 건 똑같으니까. 다른 점이 있다면 프릴이 몇 개나 되는지 세어볼 수 있다는 점이다.

“입고 있으니까.”

“나는 그걸 물은 게 아냐! 그럼 아까 그 딸기 팬티는?”그녀는 마이를 뒤지더니 쓰레기처럼 꼬깃꼬깃 구긴 딸기팬티를 들이 밀었다.

“왜, 보고 싶어?”

“어, 아니. 왜 팬티를 두 개씩이나 들고 다녀?”

“승부팬티야.”

내가 신음하자 그녀는 딸기팬티를 들었다.

“임무는 완수했으니까.”

“딸기팬티가 승부팬티였냐! 별로 야하지도 않잖아!”

“그래서, 팬티가 두 장이나 되니까 하나를 달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주제가 탈선했어! 그리고 난 그런 말은 하지도 않았다고!”“대체로 그런 어투잖아?”

“내 목소리가 그렇게 야하게 들려!?”“도대체 말하고 싶은 게 뭐야?”

“그건 오히려 내가 묻고 싶다고!”

“그러니까.”

“말 돌리지마.”

“엄마가 보고 싶어 하셔.”

나는 그녀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갑작스러운 말에 어안이 벙벙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녀의 말을 인식하기까지 내 뇌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넌 왜 항상 이렇게 뜬금없는 거야.”

“아까 생각하고 있던 게 이거였어.”

“그래서 너희 엄마가? 나를?”

“응 딸기팬티를”

“보고 싶어 하신다고?”“응, 귀엽다고 하면서.”

“왜? 어째서.”

“엄마가 딸기를 좋아하셔.”

“팬티를 보고 싶으신거냐, 난 그런 팬티 없어!”“빌려줄게, 이거.”

그녀는 손에 있던 팬티를 내밀었다.

“안 입을 거야! 내가 네 팬틸 빌려 입어서 뭐해!”

“승부팬티.”

“너희 어머니께 잘 보여서 뭐 할껀데?”그녀는 글쎄로 말을 끊고 어쨌든으로 말을 이었다.

“보고 싶으시데. 오늘 즉시 지금 당장.”

“거부권은?”

“없어.”

“집에 들렸다. 가도 돼?”

“안 돼.”

“그것보다 어째서 내가 너희 집에 가야되는 거야? 난 널 오늘 처음 만났고 너희 어머니는 내가 본 적도 없는데.”

“글세…. 엄마가 부르니까?”

그녀는 그런 말을 남기고는 아까처럼 내 옆으로 흘러가듯 지나갔다. 그녀의 부모님이 날 보고 싶어 하신다. 어째서일까. 그녀가 오늘 아침에 있던 일을 보고라도 한 걸까. 혹시 경찰서에 가서 얘기하자고 하면 어쩌지? 하지만 그녀의 부모가 일부러 그렇게까지 가르쳤는데 설마. 나는 그런 잡다한 생각을 떨쳐내지 못하고 그녀가 있는 자리만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멍하니 말뚝처럼 서있으니 갑자기 뒤쪽이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저기, 일단 이 옷 좀 놓아줄래?”

그녀는 나를 멋들어지게 스쳐지나가다 말고 내 옷을 붙잡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뒤로 걸어가고 있었다. 마이를 잡은 손을 놓으면 빠르게 거침없이 앞으로 달려 나갈 듯 했다.

“어차피 우리 집, 와야 되잖아?”

이제는 아예 부탁이 아니고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래서는 빼도 박도 못한 상태다. 일단은 그녀의 놀음에 장단을 맞추기로 결심했다.

그녀의 집은 그다지 멀지 않았다. 오히려 학교에서 출발했을 땐 내 집에서보다 가까웠다. 보도로 5분 정도 가면 도착하는 주택가 사이에 있는 빌라였다. 어째서 일부러 여기서부터 학교보다 더 먼 큰 등굣길을 찾아와서 날 들이 받았는지 다시 한 번 궁금해 졌지만 또 학교에서부터 말이 없던 귀국자녀 분께선 아직도 자신의 얘기를 꺼낼 생각이 없는 지 나보다 몇 발자국이나 거리를 벌인 채 안내하듯 표지판처럼 앞으로 향했다. 나 역시 앞으로 따라가서 그녀에게 말을 걸어봤지만 그녀는 끝까지 묵묵부답이었고 육체적으로 어깨나 팔을 툭툭 건들면 돌아오는 건 곁눈질뿐이었다. 나를 바람처럼, 공기처럼 없는 사람 취급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 다 왔어.”

그녀는 빌라 2층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닫혀있는 202호의 문으로 날 안내했다. 굳게 닫혀있는 문. 손잡이를 돌려봤지만 잠겨있는 지 꿈적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9와 4분의3 승강장처럼 여길 뚫고 들어가라고? 결계라도 쳐져있는 거야?”

그녀에게 투덜거렸더니 돌아오는 건 두 개의 구멍에 알맞은 두 개의 열쇠였다. 이 녀석은 열쇠도 사용할 줄 모르는 건가. 그러면 열쇠는 왜 들고 다니는지. 궁금한 게 한 두 개가 아니었지만 지금 물어본다고 해도 그녀가 내게 답을 할지는 미지수였다. 그녀는 내가 문을 열자마자 마치 먹는 것을 빼앗기는 듯한 아이처럼 재빠르게 나를 제치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집 주인인 건 인정해서 뭐라 할 말을 없었지만 기분이 나쁜 건 사실이니까. 나는 그녀를 뒤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실례합니다….”

나는 문을 좀 더 열어젖히고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그녀는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었고 가방은 신발장 안에 버리듯 던져버렸다. 저래도 되는 걸까. 하지만 그녀의 성격상으로 봐서는 집에서 공부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집 안으로 들어가더니 “다녀왔습니다.”라고 한 마디 하고는 주방으로 보이는 곳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녀를 따라 가방을 거실에 있는 소파 옆에 두고 조심스레 앉았다. 그녀는 도대체 어떤 집에서 살 길래 저런 모양 일까하고 생각했더니 의외로 평범한 가정집이었다. 이상할 정도의 특이한 수집품 같은 것도 없었고 그저 평범한 가정집을 빼다 박아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녀는 주방에서 나오더니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내가 그녀를 좇아 시선을 옮기자 그녀는 방을 들어가다 말고 뒤돌아서 나를 쳐다봤다.

“왜? 내 방이 보고 싶어?”

그녀의 방이 그녀와 비슷한 느낌을 가진 백금발의 애완동물 같은 방이지 않을까하는 불안한 느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럼 말고. 그리고 그 앞에 있는 방이 엄마 방이야. 얼른 들어가서 엄마 좀 불러줘.”

그녀는 내가 뭐? 하고 대답도 하기 전에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남의 집에서 남의 부모님 방에 들어가서 부모님을 불러오라니 너무 무책임한 말이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그녀에게 받은 2번째 부탁이기도 하고.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 하셨으니.

“저기 실례합니다….”

일단은 그녀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노크도 몇 번하고 문 너머로 질문도 몇 번 해봤지만 여전히 안에서는 묵묵부답. 밖에 갔다가 돌아오시지 않은 걸까. 나는 실례되는 걸 알면서도 일단은 문을 열어보기로 했다.

“저, 실례합니다….”

방 안에 들어가 보니 안에는 불이 꺼져있었다. 누군가가 살고 있다는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유령이라도 나오면 모를까. 그저 잘 정리된 창고 같은 분위기의 방이었다. 방문턱에서 몇 걸음 안 될 것 같은 곳까지 닿은 빛은 옆에 있는 책상까지의 높이로 쌓아져있는 시디 탑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그 시디들은 하나같이 게임 타이틀 같았는데.

“이 게임들은 전부 미연시 아냐?”나는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탑처럼 쌓아있는 타이틀 중 몇 개를 들어 세세하게 확인했다. 그 게임들은 전부 미연시였고 하나도 빠짐없이 R-18이라는 문구가 오른쪽 위에 잘 보이게 나와 있었다. 나는 들고 있던 시디를 다시 탑에 올려놓고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시디 탑은 이곳저곳에 쌓아져있었다. 크기는 보통 성인의 키만큼 큰 것도 있었고 작은 휴지통만한 것들도 있었다. 여기서 과연 사람이 살 수나있을까. 하고 생각이 들 정도로 시디 탑이 널려있었고 그 덕에 발을 디딜 틈이 없어 방 안에는 들어가지 못한 채 우물쭈물 거리고 있자 그녀가 어느새 다가왔다.

“뭐하고 있어?”그녀의 말에 뒤로 돌아보자 그녀는 거실의 한 가운데에 서있었다. 하얀 니삭스에 파란 치마, 그리고 그 위를 거의 잡아먹다 시피 뒤덮은 하얀 스웨터가 있었다. 게다가 머리는 또 어디다가 두고 왔는지 하얀 스웨터만 끝자락이 뾰족하게 솟아나있었다. 그녀는 스웨터 위쪽을 힘차게 잡아당겨 스웨터로부터 머리를 뽑아냈다. 머리가 부스스하게 자다 일어난 머리처럼 정전기 때문에 곳곳에서 삐쭉삐쭉 튀어나와있었다.

“어? 아니. 그 이 방을 들어갈 수가 없어서 말이지.”

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변론했지만 그녀는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못 알아듣겠다는 듯이 얼굴을 갸웃거리고는 내게로 다가왔다.

“방을 왜 들어가려고 해?”

“그럼 방을 안 들어가고 어떻게 너희 어머니가 있는지 없는 지를 어떻게 알아? 그리고 들어가질 못하면 또 어떻게 거실로 불러내고.”

애초에 여기가 방이라는 것 자체가 의미심장했다.

“들어봐. 소리가 들려.”

나는 그녀가 하는 소리에 그다지 믿음이 가진 않았지만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귀 기울여 들어보니 확실히 뭐라고 중얼거리긴 했지만 그렇게 크게 들리지도 자세히 듣지 않으면 들리지도 않을만한 작은 소리였다. 일단 부모님이 있다는 것은 알았는데. 문제는 그 부모를 어떻게 여기서 나오게 하냐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그랬더니 그녀는

“방을 들어가지 못하면 도구를 사용하면 되는 거야.”

하고는 그녀는 방 안에 있는 시디 탑의 위쪽에 있는 타이틀을 들었다. 그리고는 “이렇게”하면서 저 방안으로 힘차게 던졌다. 타이틀이 벽면에 한 번 부딪히더니 이내 악! 하는 단말마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아, 장군이 왔니?”

“그치?”

그녀는 뭔가 뿌듯하다는 듯이 자랑을 말하듯 내게 말했다. 여전히 악센트가 없는 무미건조한 목소리였지만 분위기 상으로는 그렇듯 했다. 그녀는 엄마의 안부에 아무런 답 없이 다시 타이틀을 집어 들었다.

“뭐야 또 던지려고?”

“응, 아직 헤드셋. 끼고 있을 테니까.”

그녀는 다시 힘차게 시디를 집어던졌다.

“아얏! 뭐야 도대체 왜 자꾸 던지고 그래.”

“엄마, 내 말 들려?”

“그래 들린다 들려. 그래서 장군이는 오늘따라 왜 이렇게 엄마의 사생활을 방해하는 거니? 타당한 이유가 아니면 오늘 밤은 심심한 걸로 알아듣고 잠 못 자게 해줄 테니 각오해.”

뭔가 위험한 말들이 마지막에 잔뜩 널려있었다.

“타당한 이유니까 오늘 밤은 잘꺼야.”

이상한 대화가 여기저기서 오가고 있다. 이 집안은 평범한 가정집처럼 탈만 쓰고 그 실체는 굉장했다.

“뭔데 그래?”

“지금 훈범. 와 있어. 엄마가 보고 싶어 했던 애야.”

대화 사이에 투덜거리던 그녀의 부모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잠시 동안의 침묵. 그리고 말을 더듬거리며 침묵을 깼다.

“그, 그래? 아 그렇구나. 그래. 엄마 지금 나갈 테니까. 잠시 기다려 줄래?”

호호호 웃으며 얼버무리더니 방 안쪽에서는 시디 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듯 시끄러운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아니 귀가 아플 정도다. 그녀의 부모는 이제 방을 빠져 나왔는지 방 안을 유일하게 비추는 짧은 문턱까지 온 빛에 그녀의 작은 발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아하하하, 그런 일이면 빨리 말해주지 그랬니.”

노트북이 말을 하고 있다. 지금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녀는 양 손으로 노트북의 끝을 잡고 있었다. 그녀가 보이는 곳은 발부터 복부까지. 반바지와 티셔츠의 차림의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나왔다.

“그래, 그래. 이제 나왔으니까 이만 이 방문은 닫자.”

역시나 저런 타이틀은 남한테 보여주고 싶지 않은지 노트북은 방을 나오자마자 문을 닫았다.

“자자, 어서 가자. 거실로 가자 거실.”

노트북은 내게 마치 지시하듯 손으로 소파를 가리키더니 등을 떠밀었다. 이쪽도 굉장한 근력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노트북의 손에 떠밀려서 소파에 착석했고 그러자 내 옆에는 채림이가 앉았고 내 앞에는 노트북이 멀뚱히 서있었다.

“채림아, 뭐하는 거니. 얼른 거기서 나와. 그리고 주방에 있는 의자도 좀 가져오고 말이야.”

노트북은 한 손을 지지대처럼 노트북을 받치고 한 손으로는 그녀에게 주방을 향해서 손짓하며 명령했다. 노트북의 크기는 대략 17인치 정도 되는 꽤나 큰 크기였는데 그녀는 그 행동을 밥을 먹듯이 익숙해보였다. 그녀의 작은 체구가 가려진 채로 의자가 주방에서 나오자 노트북은 그녀의 고생도 모른 채 가져온 의자에 냉큼 앉고는

“얼른 가서 하나 더 가져와. 네가 앉을게 있어야지. 소파에 앉는 건 안 돼. 냉큼 가서 가져와.”

그녀와의 작은 말다툼이 있는지 채림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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