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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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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아! 내가 그녀에게 찍혔다
글쓴이: 소마녀
작성일: 12-02-15 22:12 조회: 2,042 추천: 0 비추천: 0

이웃 지인 중에 요리를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다.
시시한 이야기다. 좋아한다고 해서 다 잘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이용해 만들어진 하나의 캐릭터 같은 여자, 정말 말도 안 되게 요리를 못하는 그녀의 이름은 올리비아 윈슬릿. 영국에서 온 지 십 년쯤 된 유학생이다.
처음 만난 것도 그쯤이어서 당시에는 서로 언어가 맞지 않아 꽤 고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떻게든 몸과 표정만으로 소통을 나눠서 알게 된 사실은 그녀와 나 둘 다 연극을 좋아한다는 것. 그것을 처음으로 나는 그녀를 알게 되었다.
그렇게 지금의 고등학교까지 이어지고, 여럿 사이에서 같이 활동하는 ‘우리 연극부’가 탄생한 것이다.
이야기 속 배경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무가치 일상

올리비아와 나는 이웃으로서 서로 도와주며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사실 내가 그녀에게 주는 도움은 이미 잊혀진 지 오래다.
함께 사는 가족이 없는 나는 매번 그녀에게 도움만 받으며 살고 있다. 말하자면, 지금도 올리비아가 우리 집에 와서 일부러 저녁을 차려주고 있다고나 할까.

여기서 또래 여자가 챙겨준답시고 나를 부러워한다면 그것은 필시 오해다. 처음에 소개했던 올리비아의 특징에 의해, 나는 올리비아가 옆에 있으면 일부러 배고프다는 말도 안 하는 사람이다. 오늘도 하굣길에서 헤어지고 문자 한 통 안 보내고 있었는데 그녀가 스스로 소식도 없이 직접 찾아왔다는이 바로 그 증거다.

처음에는 당연히 사양하려고 했지만─해야 한다─일부러 재료까지 사 왔다길래 들여보내지 않을 수도 없었다.
남자로서 그런 예의까지 거절할 수는 없잖아. 지금은 한숨을 쉬고 있지만, 그래도…….
아니. 솔직한 심정을 말하겠다.
“아아…….”
나는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올리비아의 “절대로 부엌에는 와보지 않아도 돼요!”라는 자신 있는 한마디에 그만 TV 앞에 앉아 부엌만 힐끔힐끔 쳐다보는 신세가 돼버린 것이다.
그 와중에 드는 생각도 많다.
이를테면 「저녁 먹었다고 했으면 그냥 돌아가 주지 않았으려나…?」 같은 생각. 왜 이런 좋은 아이디어는 이제 와서 떠오르는 거냐? 하고 같잖은 후회도 해본다.
반면 내 심정 같은 건 전적으로 「아웃 오브 안중」인 올리비아는 아름다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지글지글 요리하는 소리를 내고 있다.
참고로 말하자면 그건 악마 같은 소리다. 식당에서는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식욕을 돋우는 아주 좋은 소리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게 올리비아가 내는 소리라면 말은 180도로 달라진다.

이것이 이치.
벗어날 방법은 없다.

“자아, 완성이에요!”
올리비아의 목소리를 듣고 부엌에 가 보니, 식탁 위에 차려진 것은 스파게티 두 접시, 그리고 먹음직스러운 냉수 두 컵이었다.
우와…, 냉수라고?

올리비아가 차린 밥상에도 먹을 만한 게 있다는 것에 일시적이라도 다행을 느꼈다.

“탄산음료를 사 왔어야 했는데, 그 점이 벌써부터 아쉽네요.”
“무슨 소리야? 냉수만으로도 감지덕지지.”
나는 자리에 앉아 포크를 들었다. 올리비아는 나와 마주 보는 위치에 앉아서 포크를 들기도 전에 얼굴부터 붉혔다. 복숭아처럼 두 뺨이 달아오른 그녀는 왜인지 나만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왜 그래, 올리비아?”
그 부담스러운 눈길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물었다.
올리비아는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낮추더니,
“머…, 먼저 맛보시라구요.”
수줍은 듯이 그렇게 말했다.
……먼저 맛보라고? 이 스파게티를?
냉수라면 그러겠다. 하지만 스파게티는 안 돼. 내 작전을 수포로 돌려보낼 수는 없다고.
「올리비아가 먼저 스파게티를 먹고 기절하게 내버려 둔 다음 내 스파게티를 안전하게 냉장고 안으로 숨긴다」와 같은 완벽한 작전은 언제 어디서나 쉽게 떠오르는 게 아니잖아.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도 그리 간단히 떠오른 건 아닐 거라고.
“난 괜찮은데. 너부터 먹어.”
나는 친절한 목소리로 순서를 양보했다. 그러자 왜인지는 몰라도 올리비아의 표정이 더 밝아졌다.
“레이디 퍼스트…인 건가요? 시운 씨의 그 신사적인 태도는 몇 년째 변함이 없네요!”
올리비아는 엉뚱한 소리를…이 아니라, 알아주다니 이렇게 고마울 수가 있나! 그런데 몇 년째 변함이 없다니, 내가 신사적인 태도를 보였던 게 또 언제였지?
“그렇다면 숙녀답게 신사의 호의를 무시할 수는 없죠. 제가 먼저 맛을 보겠어요.”
나도 숙녀의 호의를 무시하지는 않겠다. 먼저 기절해 주겠다니, 역시 영국에서 온 아이는 대단하구나. 배려심이 남다르다.
한 손으로 포크를 집은 올리비아는 면을 돌돌 말았다. 이어서 엄지 두께의 두 배 정도가 말리자 그녀는 과감하게 입속으로 포크를 찔러 넣었다.
반응은?
실로 놀라웠다.
“음…. 괜찮은걸요.”
“응?”
“전에 만들었을 때랑 다를 건 없는데, 그래도 맛은 있어요. 정말 다행이에요.”
정말 여러 의미로 놀라웠다. 나는 그 의미심장한 말을 빠르게 분석해 봤다.
예상대로 놀랍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첫째로 놀라운 점은 「음….」이라는 감탄사다. 이건 맛을 음미할 때에나 나오는 소리인데, 올리비아의 음식은 맛을 음미하기도 전에 기절해버린다는 특성이 있다. 불가능하다.
그다음으로는 역시 「괜찮네요.」가 문제 되시겠다. 하지만 올리비아의 음식을 먹고 괜찮다는 반응이 나왔다는 문제는 사람의 지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불가사의이므로 패스.
그리고 「전에 만들었을 때와 다를 건 없는데」……이 정도면 말 다했다. 내 앞의 스파게티는 먹을 게 못 된다. 올리비아는 항상 자기 요리를 먹으면서 면역이란 게 생겼기 때문에 맛을 음미할 수 있는 거고, 그것을 소화할 만한 야무진 위장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고로 내가 이 스파게티를 먹어서 똑같은 반응이 나올 리는 만무하다.
“자, 그럼…. 이제 시운 씨도 드셔요.”
나를 보며 방긋이 웃는 올리비아. 그녀로부터 무게감이 느껴지는 정체 모를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자, 아~ 하세요.”
내가 자꾸 꾸물거리자, 올리비아는 친히 포크를 들고 내 옆자리로 와서는 돌돌 묵직하게 만 스파게티를 내밀었다.
굉장한 크기……. 내가 지금 그걸 보면서 느낀 게, 여기서 자리를 뜨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근데, 나는 자리를 떠봤자 올리비아한테 잡히잖아?
난 안 될 거야…, 아마.


대충 그런 식의 식사가 끝나고.
올리비아는 내가 시무룩하게 앉아 있으니까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런 걸 먹었으니 당연하잖아. ……물론 이 정도로 솔직하게 해명을 해서는 안 된다. 사람이 때로는 거짓말도 해 줘야 무서운 세상에서도 수월히 살아갈 수 있는 거 아니겠어? 솔직히 말 한 번 잘못해서 코뼈 부러지는 것보다는 코가 길어지는 게 낫다.
“어휴…. 정말 걱정되네요.”
급기야 한숨까지 몰아쉬는 올리비아. 그런데 걱정된다니? 네 요리 실력이 말이야?
그걸 이제 깨달으면 어쩌자는 거야.
“뭐가 그렇게 걱정돼?”
나는 하다못해 물었다. 딱히 궁금한 건 아니고 예상도 하고 있지만, 여자가 저럴 때는 말상대를 해 줘야 한다고 어디선가 들었기 때문이다.
“그게 있지요…….”
올리비아는 잠깐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실은 어젯밤에 나쁜 꿈을 꿨어요. 그것 때문에 한참을 고민하게 돼요.”
이럴 수가…, 내 예상이 빗나갔다. 올리비아는 자기의 요리 실력에 대한 긍지가 참 대단한 모양이었다. 좋은 현상이지만 남에게는 세계대전급으로 피해가 가는 증상이다.
농담─아닌 농담─은 뒷전에 두고, 우선은 올리비아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기로 했다.
“무슨 꿈?”
대답은 곧바로 왔다.
“아주, 아주 나쁜 꿈이었어요. 저 그 꿈을 꾸고 그만 울어버렸지 뭐예요……. 무, 물론 엉엉 울지는 않았으니까 그런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지는 말라구요!”
내 얼굴 어디에 그런 눈이 있다고 그러냐.
하긴 고작 꿈 하나 꿨다고 울기까지 했다는 것은 이상한 눈으로 봐도 될 만하다. 그게 얼마나 큰 충격을 주는 꿈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뭐야?”
“네. 저기, 내일이 이번 연극제 리허설이 있는 날이잖아요?”
올리비아가 눈가에 살짝 맺힌 이슬만 한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치면서 말했다.
“응. 어제도 연습이 있었다고…….”
“네, 잘 알고 계시네요. 안타깝게도 시운 씨는 참여해주지 않았었죠?”
올리비아는 그쯤에서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나도 결론이 그게 아니라는 건 알지만, 그녀로서는 약간은 섭섭한 마음이 있을 것이다.
나는 올리비아의 기분을 맞춰 주려고 일부러 웃어 보이면서 말했다.
“별로 신경 쓰지 마. 난 원래 옛날부터 연습 잘 안 나갔잖아.”
“하긴 그렇긴 해요. 시운 씨는 연습 없이도 항상 잘해 왔었죠. 제가 다 뿌듯할 정도로.”
그 마지막 말을 소곤대듯 말하며 올리비아는 희미하게 웃었다. 뿌듯하다는 말이 그리 내키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냥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그치만 이번에는 모르겠어요. 꿈이 너무 불길해서 말이죠. 알고는 계세요? 제가 꾼 꿈이 실현되었던 적이 지금까지 자그마치 두 번이에요. 만약 이번에도 그렇게 되면……. 아니, 이번에는 기필코 막고 말겠어요! 그럼요!”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올리비아가 갑자기 벌떡 일어서면서 그렇게 외쳤다. 침울해 있던 때가 언제인데 참 뜬금도 없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아마 올리비아가 처음 내게 요리해 주겠다던 때도 대충 이런 느낌이었을 것이다. 온몸이 땀에 젖었었던지라 잘 기억하고 있다.
“저기, 미안해요. 저 이만 가봐야겠어요. 내일을 위해서 마음다짐을 단단히 할 거예요! 당장 산이라도 올라갈 생각인데, 혹시 저를 붙잡을 생각인가요?”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당장 등산복이라도 대령해 드리고 싶은 것이 현재 심정이다.
“고마워요. 저 아주 열심히, 열심히 수련하고 올 거예요! 정말 고마워요!”
거기서 왜 고맙다는 말이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올리비아는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현관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그러고는 쾅! 하고 문을 닫아버렸다.
나는 제자리에 경직된 상태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
아니, 가든 말든 상관은 없는데─물론 일찍 가주니까 좋긴 좋다─결론은 말해주고 가야지.
그래서 결국 무슨 꿈이냐고…….
찝찝한 마음을 허공에 털어놓으며, 나는 소파에 아예 드러누웠다.
올리비아가 하다 만 말이 기억에 남아 있긴 하지만 그래서 잠을 못 잘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졸린다. 내일부터 연극제 때문에 바빠질 텐데 벌써부터 이렇게 피곤해도 괜찮을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잠깐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것 같아서, 나는 편하게 눈을 감았다.
올리비아가 요리를 해주는 날이면 항상 이렇듯 피곤하다.


Ⅰ. 줄과 머리카락

눈을 떴을 때, 나는 떨고 있었다.
방 안에 영문 모를 한기가 돌았다. 꽤 지속되어 온 듯 소파마저 찼다.
나는 정신을 되찾고, 소파에 누운 내 엉터리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니, 아직 정신이 덜 들었나 보다. 지금은 이 한기의 원인을 찾아야 할 때다.
잠이 덜 깬 두 눈을 쓱쓱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제대로 눈을 뜨고 보니, 거실에도 부엌에도 불이 켜져 있었다. 때마침 날이 밝아서 별로 조명 효과도 크지 않은데 말이다.
‘전기세…….’
문득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터벅터벅 소리가 나면서도 재빨리 걸어가 불을 모두 껐다. 그리고 그다음은……. 뻔하지 않은가.
저 빌어먹을 창문은 왜 열려 있는 거야?
거실 베란다 쪽 창문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생각했다.
능동적이지 않은 창문을 욕한 건 미안하지만─생각해 보니 사과를 하는 것도 이상하다─정말로 짜증이 나서 그랬다. 아직은 여름이어도 이제 곧 가을로 접어드는 시기이다. 낮, 적어도 저녁까지는 체감하지 못해도 새벽에는 다르다 이 말이다. 나는 멍청하게 문도 안 닫고 잘도 잠에 빠졌던 건가?
아, 그런데 어제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보니 의외로 타당성이 있었다.
무려 올리비아가 왔었으니까.
아니지. 그런 식으로 말하면 올리비아한테 너무 미안하다. 사실 거기까지만 하면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어릴 때부터 놀러 오곤 했었으니까 지금은 하나의 일상이라 해도 좋다.
그렇다면 「올리비아가 와서 스파게티를 만들었다」가 원인 되시겠군.
그렇게 결론지었다.
드르륵─탁.
마음 같아선 힘세고 강한 아침을 반겨줄 겸 바깥을 보며 기지개라도 켜고 싶지만, 해가 뜬지 얼마 안 돼서 아직은 쌀쌀하기에 나는 과감히 창문을 닫았다.
그러면서 아주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다음부터 올리비아가 놀러 올 때를 대비해 항상 일찍 밥을 준비해 놓는 거다. 그러면 그 애가 요리하려는 것도 막을 수 있고, 동시에 나의 가정적인 모습을 어필할 수도…….
아니, 아무래도 방금 그 말은 취소다. 소꿉친구한테 어필은 무슨 얼어 죽을 어필.
창문을 닫고 방에서 얇은 이불을 가지고 나와 담요처럼 몸에 두르고 있으니, 점점 몸이 따뜻해졌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여름 감기에 걸리는 수치를 당할까 봐 나는 오랜만에 내 몸 관리에 나섰다.
아침을 먹기 전에 마실 차를 끓이려고 주전자에 물도 담아 올렸고, 이불을 두른 채 하기는 뭐하지만 달걀을 깨서 내용물을 프라이팬에 얹었다.
그리고서 잠시 넋을 놓고 서 있는데, 문득 내 눈에 보인 것이 있었다.
어제 올리비아가 만들어 먹은 스파게티의 흔적이었다.
“…이런.”
또 할 일이 생겼다.


“에… 에…. 에…….”
코가 약간 가렵다 싶더니, 급기야 콧속에 굉장한 진동이 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강력한 기운을 품은 뭔가가 용솟음치듯 콧구멍에서 터져 나올 것 같던 그 순간──!
“에…! 에, 에…? …….”
파도가 잔잔해지듯, 콧속의 터지면 몹시 기분이 좋을 것 같은 무언가가 스르르 가라앉고, 그다음엔 딱히 감동을 한 것도 아닌데 왠지 코끝이 찡하게 시어 온다.
“끄으어아아아악! 말도 안 돼!!”
목청이 터지듯 절규하고도 또 온몸을 이용해서 현재 내 절망적인 상황을 알린다. 암 그럼 당연하고말고! 방금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을 놓친 것 같은 기분이었단 말이야!
“뭐가 그리 말도 안 돼?”
땅을 내려다보며 아쉬움을 호소하던 나는, 기운이 없어서 몸을 돌리는 대신 고개를 틀어 봤다. 거의 매번 들어서 익숙한 그 목소리는 뒤쪽에서 들려온 것이었다.
“서, 서유리…. 설마, 요태까지 나를 미행한 고야?!”
“또 멍청한 소리. 지나치려고 했는데, 네가 하도 심심해 보였을 뿐이라구. 넌 원래 혼자 노는데 그렇게 호들갑스럽게 놀아?”
남의 혼자 놀이에까지 관여하려고 하는 이 여자분은, 내가 소속한 연극부의 부장 되시는 분이다. 학생치고는 몸매도 좋고 가슴도 크고─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은 부분이지만─얼굴도 예쁜 데다가, 분장할 때 딱히 화장을 하지 않아도 흠이 없을 정도로 피부까지 하얗고 좋다.
여기서 분장만 제대로 하면 정말 판타지 속에서 묘사되는 청초한 엘프(Elf)의 모습이 나올 정도라고나 할까. 금발의 미인인 올리비아와 더불어 우리 연극부의 간판스타이기도 하다.
“방금 그게 호들갑으로 보였다면 큰 오산이다…. 무려 재채기에 실패했단 말이야.”
“헤에, 그건 네가 기술이 부족해서 그런 거 아니야?”
오호라, 이게 사람을 제대로 무시하네?
“아니거든? 난 말이지,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걸 이용해서 머리를 이쪽으로 돌리고, 또 얼굴을 최대한 위쪽으로 향했단 말이야. 기술적인 문제는 없었어!”
나는 여기가 무대 위도 아닌데 괜히 과도한 동작을 해 보였다.
그러자 유리가 지은 웃음은 일종의 비웃음이었다. 입꼬리만 살짝 올리는 것이, 예뻐 보이면서도 분명히 조롱이 섞여 있었다.
“넌 아직 한참이나 미숙해. 얼굴을 최대한 위쪽으로 올린 건 너무 큰 실책이었잖아. 눈이 정확히 해를 바라보고 있도록 하고 아주 가늘게 실눈을 떴었어야 했어.”
“그, 그런 비책이…….”
애매한 지적이긴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랬으면 확실히 재채기가 나왔을 것 같다. 앞으로 유용하게 사용해야겠는걸.
그런데 아까부터 계속 작은 소리로 웃던 유리가 급기야 내 얼굴을 보고는 배를 쥐어 잡고 웃기 시작했다. 뭐야, 고작 혼자 웃는데 너무 호들갑스럽게 웃는 거 아니야?
“아하하……. 비책은 무슨. 이건 국민적인 상식이야.”
“그래?”
그제야 유리가 왜 웃었는지 알 것 같았다. 오호, 상식이라 이 말이지. 근데 왜 나는 몰랐지? 것보다 상식치고는 너무 유용한 정보잖아?
유리는 내가 생각하는 틈을 타 화제를 바꿔서 말했다.
“저기, 오늘따라 왜 이렇게 네가 바보처럼 느껴지지? 혹시 그것도 연기하는 거야?”
“뭐?”
그 질문에는 대답하기는커녕 도리어 짧게 되물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이라기보다는 어이가 없는 질문이었다.
그러니까……, 으음. 얘가 뭔 소리래?
“너는 평소랑 무대 위에서랑 너무 다르잖아. 평소에도 이렇게 바보 같기는 한데, 어어……. 글쎄, 바보를 연기할 때의 네 모습이 더 바보 같다고 할까?”
“이해 못 하겠는걸.”
우리는 걸으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등굣길에서 시간을 너무 많이 소비했다. 이러다가 지각하지는 않으려나.
“말하자면 너무 복잡해. 그러니까, 너는 무서울 정도로 연기를 잘한다 이 말이야. 물론 너도 알고, 모두가 알고 있겠지만.”
“나는 무대 위에서 말고는 연기 같은 거 안 한다고. 바보같이 뭐하러 그럴 필요가 있어?”
“그러니까 그건 단지 그렇단 이야기지. 으이구, 아무래도 방금 그 말은 취소해야겠다. 너 같은 바보한테 내가 무슨 말을 하겠니? 그냥 천천히 되새겨 봐. 이젠 말 안 할 거니까.”
아니, 난 정말로 바보인가 봐. 네가 방금 되새겨 보라는 그 말도 막상 생각해 보려니까 기억이 안 나는데…….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는 기억하기도 힘들다는 말이 사실이었나. 아, 그렇지. 수학 공식이 그 대표적인 예로군. 이거는 쉽게 이해가 갔다.
“하여튼간 오늘 리허설은 기대하고 있을래. 지금까지 너 믿고 연습 많이 빼준 거니까 엉망이면 알아서 해야 해.”
“알았어.”
정문에서부터 현관까지 우리가 한 대화는 그게 전부였다. 유리는 벌써부터 리허설을 걱정하는 것 같았지만 내색은 전혀 하지 않았다. 나는 그냥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닫고 있었다.
리허설은 반마다 자기 반에서 치러지며, 학년마다 있는 연극부만이 따로 강당의 무대를 사용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내가 속해 있는 1학년 부는 2교시쯤에 시작된다고 통보가 와서 아침 자습만 끝내고 서둘러 부실로 가야 한다.
“그럼 나중에 보자.”
“어라? 같이 안 들어가?”
반을 지나치는 유리에게 내가 말했다. 유리랑 나는 같은 반인데?
“바보. 이래 봬도 부장이니까 여러 가지 준비해 놔야지?”
그런 의미였다. 어이구, 웬일이신가? 아무래도 우리 부장님께서 오늘은 상당히 긴장하신 모양이다.
표정도 말투도 내색은 전혀 담겨 있지 않았지만?단지 청순해 보일 뿐이었다?뭐라도 일찍 시작하고 싶은 듯한 마음이 그걸 잘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피식 웃고 교실로 들어갔다. 뭘 하든 항상 즐기는 것처럼 보이던 유리도 긴장이라는 걸 할 때가 있구나. 오랜만에 아주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어 기쁘다.
그래서인지 나는 다시 뒷걸음을 쳤다.
“왜 도로 나왔어?”
부실로 올라가는 유리를 붙잡자 그녀가 처음 하는 말이었다.
“아침 자습하기 싫어서.”
“정말? 나랑 같은 이유네.”
유리는 지극히 진심인 듯한 표정이었다.
그걸 보니 아무래도 내 예상은 틀린 모양이었다. 딱히 내색하지 않는 게 아니라 진짜 긴장을 안 하는 거였구나.
하긴 이 마음 편한 여자가 긴장을 한다니 말도 안 된다.
“그런데 나는 너랑 있기 싫은데. 한 시간 동안이나 너랑 단둘이 그 좁은 부실에 있어야 한다니, 단지 생각만 했을 뿐인데도 몸이 거부 반응을 보이고 있어. 나만 부실로 갈래.”
나는 그 말을 듣고도 딱히 마음의 상처를 입거나 하지 않았다. 저 청순한 얼굴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굉장한 독설인데도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것은, 아마 유리가 장난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것보다는 사실 지금껏 많이 당해봐서 내성이 생긴 탓이 크겠지만.
“그럼 난 어디로 가야 되냐.”
“너는 화장실에 가서 내 생각이나 해.”
“화장실에서 네 생각을 하면 뭐가 되는데?”
나는 유리가 이해 못 할 말을 해서 고개를 기울였다.
“흥분.”
“…….”
무슨 목적으로 저런 말을 입에 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저렇게나 필사적인 유리를 위해 자리를 비켜주기로 했다.
“화장지는 여자화장실에 많으니까 없으면 떼서 쓰도록 해.”
“멍청아! 진짜로 갈 것 같냐!”
내가 걸음을 멈추자 유리는 빠른 속도로 나를 앞질러 갔다.
갑자기 저런 여자가 이 학교 모든 남학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것에 굉장한 유감을 느꼈다. 웬만하면 이상한 단어는 입에 담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어찌 됐든 내가 갈 곳은 이미 정해져 있다.
다시 교실로 돌아가서 책이나 읽는 것도 싫으니까 당연히 그곳은 배제된다.
그렇다고 화장실도 아니다.
“강당은 6층이었나…….”
나는 계단을 올랐다.
오르면서 보인 괴상한 마녀 복장의 소녀는 태연하게 무시해 버리기로 했다. 애당초 그런 설정이다, 우리 연극부는.
일상에서 연기하는 녀석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여기가 강당.”
예상대로 6층에 있는 큼직한 문을 열고 나는 강당에 들어갔다. 문이 잠겨 있지 않아서 다행이었지만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장소라는 것에는 벌써부터 싫증이 났다.
무대장치 하나 빼고는 전부 무준비 상태였다.
그런데 그 무대장치조자도 낯모르는 물건이었다. 장치라기보다는 자살할 때나 쓰는 목줄 같은 것으로, 천장 위에 묶인 그것은 내 목 높이까지 내려와 축 처져 있었다.
집어넣는다면 머리를 집어넣을 수도 있을 만한 크기였다. 대개 괴담에서나 나올 법한 소도구로, 상상만으로도 등 뒤가 섬뜩해지는 느낌이었다.
“목줄…이 맞는데.”
재확인 삼아 가까이 올라가서 만져도 봤지만 달리 이것을 칭할 명칭 같은 건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목줄이다. 사람 목을 맬 수도 있고, 스스로 목을 매 죽을 수도 있는.
“이런 게 왜 여기에…….”
거기에서 내 말은 끊겼다.
“……?”
심정이 무의식에서 당황으로 이어지기까지는 굉장히 짧았다. 무방비한 등을 누군가가 밀었을 때까지만 해도 관심은 전적으로 목줄에 쏠려 있었다. 그러나 그 목줄에 내 머리가 들어가고, 누군가 뒤에서 줄을 당기는 느낌이 왔을 때에는 공기가 확 달라져 있었다.
“──!”
기침 직전의 수준으로 목이 꽉 막혔지만 터져 나오지가 않았다. 고로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생존의 본능으로 발목을 뒤로 당기고 까치발을 들었을 때에야 비로소 기도가 확 뚫렸다.
“허억…, 하아…….”
실제로 그 시간은 짧았지만 당황과 놀람으로 심장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더러 내 시야가 떨리는 것도 보였다. 그것이 창문의 서리가 닦이듯 선명해지고 나서야 나는 눈앞의 존재를 깨달았다.
“안녕!”
만남과 대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질적인 소녀였다.
유럽 쪽인지 아메리카 쪽인지까지는 무리지만 백색증이 있어 보일 정도로 피부가 하얗다는 것, 그리고 그에 걸맞은 긴 은발을 지닌 외국 소녀라는 것쯤은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웃음 또한 유별났다.
너무 얇고 깔끔해서 바늘이 닿으면 푹 터질 것 같은 매끄러운 입술은 아기를 보는 듯했다.
그 충격으로 나는 이렇게나 눈에 띄는 여자애를 지금까지 몰랐다는 사실에 중점을 둬야 했다.
교복을 입지 않고 딸랑 검은 블라우스 한 장만 걸쳤다는 점에서 우리 학교 학생이 아닐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나이도 열 살 전후로 보이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내 착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강당에는 나와 이 소녀밖에 없다.
결국 내 등을 밀었을 용의자는 하나밖에는 안 나온다.
“이힛.”
소녀가 웃었다.
사람의 이런 모습을 보고도 태연히 웃을 수 있다는 것은, 지극히 순진한 쪽이던가 아니면 미쳤을 경우에만 가능하다.
전자라고 믿고 싶지만 내 등을 민 것이 저 소녀라고 가정했을 때 미친 쪽이 맞는 것 같다.
“저기.”
말하기 직전에 나는 고개를 좀 더 내렸다.
소녀가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지만 눈을 마주칠 수가 없어서였다. 말하자면 키가 굉장히 작은 여자였다.
“이것 좀 풀어주겠어? 꼬마…아니.”
호칭을 모르겠다. 어쩌면 단지 키가 작은 것뿐일지도 몰라서 나는 그 점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기로 했다.
“이걸 풀어달라는 말이야?”
우려했지만, 다행히도 의사소통이 통하는 녀석이었다. 우리 학교 유학생이 대개 그렇듯 이 소녀의 한국말도 서툴지는 않았다.
“그래.”
희망이 보였다.
“싫어.”
사라졌다.
“왜야, 왜!”
급기야 다리가 떨리기까지 해서 나는 더 급해졌다. 아킬레스건에 무리가 갈지도 모른다.
“앙지랑 놀고 싶어서 그래. 오랜만에.”
“나도 놀고 싶어! 학대당하고 싶지 않다고!”
진심을 말했더니 소녀의 표정이 약간 험악해졌다.
“앙지를 학대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
“그럼 나는 왜! 그 자식이 누군데 나랑 차별하는 거야?”
나도 한번 똑같은 표정을 지어 봤다.
그러나 소녀는 물러설 기세가 없었다.
“나는 너를 보고 앙지라고 한 건데?”
“뭐?”
이게 어디서 개수작이야, 라는 말이 목의 아치까지 넘어왔다.
“앙지는 너. 내 인형. 네가 앙지라는 말이지.”
그런 나를 시험해 보듯 소녀가 팔짱을 끼고 말했다.
나 = 인형 = 앙지.
이런 공식은 배운 적이 없는데? 선행 학습 같은 건 하지 않는 내게는 굉장히 낯선 공식이었다.
“그 증거로 어제도 널 봤어.”
소녀가 블라우스를 아래로 쭉 잡아당기며 말했다. 아까 어깨를 올리고 팔짱을 낀 탓에 옷이 살짝 올라왔었던 모양이다.
“베란다 창문이 열려 있었지? 분명 다 올라갔었는데 하필 경비한테 걸리는 바람에 쭈─욱 떨어졌어!”
“마,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소름이 돋았지만 티 내고 싶지 않았다. 분명 창문은 열려 있었으니까.
“말이 돼. 줄을 타고 내려갔으니까 다치지 않았어, 당연히.”
소녀는 요점을 완전히 다른 부분에 두고 있었다.
“그걸 말하는 게 아니잖아! 남의 집은 어떻게 알고 멋대로 들어오려고 한 거야! 점쟁이가 내가 무슨 전생에 너희 부모라도 죽였다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이번에도 팔짱을 끼고 고개를 휙휙 젓는 소녀. 혹시나 해서 밑을 봤는데, 역시나 블라우스가 또 올라가서 하얀 팬티가 빼꼼히 드러나 있었다.
“……”
별로 감흥은 없다.
“아무튼 결국 이런 거야. 앙지가 내 함정에 걸렸는데 그건 내가 만들어 놓은 함정이었던 거지.”
“그걸로 끝이라는 거야?”
“아니. 또 나는 앙지를 풀어주기 싫어. 앙지는 나를 잊어버렸을 거기 때문에 꼭 강한 이미지로 남아야 하거든.”
“넌 이미 괴짜의 이미지로 남았어.”
“어머, 그건 싫은데!”
싫다면서 만족스럽게 미소 짓는 걸 보니 진짜 괴짜가 맞는 모양이다. 이렇게 어린 괴짜는 처음 본다.
아니, 어려 보이는 괴짜는.
“……알았으면 이만 풀어 줘.”
한계가 왔는지 종아리의 근육이 점점 조이고 뒤엉키는 아픔이 왔다. 쥐가 처음 났을 때의 고통이 되새겨져 전신에 식은땀이 흐른다.
나는 소리쳤다.
“풀어 줘, 풀어 달라고!”
그러나 소녀는 내 말은 무시한 채 자기 입에 손가락을 댔다. 순간 눈빛이 바뀌었다.
“쉿, 조용히 해. 누가 오고 있는 것 같아.”
소녀는 그렇게 말하고, 갑자기 날카로운 귀를 쫑긋 세웠다. 그쪽으로 근육이 발달했는지 정말 귀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더군다나 굉장히 작은 귀여서 고양이를 보듯 귀여웠다.
물론 지금이 그런 감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방금 저 녀석이 뭐라고 했더라? 누가 오고 있다고?
내가 잘못 들은 것이기를 빈다.
“앗, 안 돼. 벌써 와버렸어! 큰일이야, 큰일!”
빌었더니 더 안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내가 판단을 못 하고 허둥지둥하고 있자, 소녀는 입에 대고 있던 손가락을 내렸다.
그 손으로 줄을 풀어줄 줄 알았더니 어느새 내 앞에서 나랑 같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
문득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든 나는 진정을 되찾고, 여전히 정신없는 소녀에게 소리쳤다.
“야, 이거 풀어나 달라니까!”
그럼에도 소용이 없었다. 애써 진정시켰던 마음이 다시 달아올라서 나는 목줄을 끊으려고 발악을 해봤다.
무의미했다.
게다가 강당의 큰 문이 금방이라도 열릴 것 같았다.
나는 끝내 발가락에 힘을 주고 미끄러지지 않도록 아주 조금씩 움직여서, 소녀 쪽으로 등을 돌리고 말했다.
“푸, 풀어! 풀어 줘!”
그러나 뒤를 보였더니 오히려 뒤통수를 맞았다.
물론 물리적이 아닌 쪽으로. 살면서 여자애한테 맞아본 간접적 통수는 이번이 처음이다.
“메에─롱! 사실 지금까지는 전부 연기였습니다~. 실은 나 이렇게 태연한걸!”
“치, 치사한 녀석! 이 나를 버리는 거냐?!”
뒤로 슬금슬금 빠지는 소녀를 보고 내가 어이가 없어서 그렇게 외쳤다. 대기실로 이어지는 문으로 도망치는 소녀는 내 걱정은 전혀 하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마지막으로 “이힛!”하고 조롱까지 하며 나를 비웃었다.
이것이 배신…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잔인함인가.
그렇게 통감하고 있을 때였다.
소녀가 강당에서 사라짐과 동시에 드디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
털썩 주저앉는 소리는 그 직후에 들려왔다.
참고로 말하자면, 나는 멀리서 보면 눈을 감은 채 목을 매달고 있는 「시체」나 다름없게 보인다.
“꺄아아악!”
내 이럴 줄 알았다.


그로부터.
우여곡절 끝에 세 시간이 지났다.
리허설까지 다 마쳤다는 소리다. 괴짜 소녀에게 붙잡혔다가 「자살 시도」라는 오해를 받아 올리비아에게 뺨을 맞기를 수십 대. 다리에 쥐가 나서 바닥에 누워 빙빙 구르기를 십여 분. 부실에 가자마자 올리비아를 울렸다는 등 비난은 받을 대로 받고 간신히 무대에 입장.
그리고 지금의 대기실로 이어진다.
나는 붉게 달아오른 양쪽 뺨을 만지며 소파에 시무룩하게 앉아 있다.
리허설 직후라고 해서 이상한 오해를 할 것 같아서 말하는데, 결코 리허설이 실패로 끝나서 기운 빠진 것이 아니다. 리허설은 거의 완벽하다시피 끝났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 정도쯤은 예상해라.
그 괴짜 은발 여자애 때문이 아니고서야 내가 왜 이러고 있겠어? 사람을 자살자로 몰아놓고 자기 혼자 도망치다니, 어처구니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없다.
도망치지 않고도 나를 풀어줄 시간은 있었을 텐데.
장난을 장난에서 끝냈더라면 좋은 인연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이래서야 원한 말고는 생긴 게 없다. 이미지도 괴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다시 나타나면 엉덩이를 때려주고 싶다.
그것이 본론. 올리비아한테 뺨을 맞은 개수만큼 때려줘야 한이 풀릴 테지만, 한두 대 정도로 끝낼 수도 있다.
왜 엉덩이를 선택했느냐에 관심을 둔다면 당신은 변태다.
그럼 그런 가녀린 여자애를 때려야 한다고 쳤을 때, 엉덩이 말고 또 달리 때릴 만한 데가 어디 있겠어?
물론 정말로 때리지는 않는다. 농담은 이쯤에서 끝내는 것이 옳다.
나는 지금 한 단계 더 높은 고비를 앞두고 있다.
유리가 리허설 정리가 끝났는지 나밖에 안 남은 대기실에 들어온 것이다. 옷은 교복으로 갈아입었지만 화장은 지우지 않고 있었다.
내 옆에 와 앉았다.
“한심해.”
“뭐가!”
수고했어, 같은 말도 아니고 한심하다는 말부터 꺼냈다. 도대체 나에 대한 이미지가 어떻게 변한 거야? 소문은 어디까지 퍼진 거냐고!
“대충 과장되지 않은 소문을 들었어. 너…… 올리비아를 꼬드겨서 동반 자살을 하려고 하다니. 너무해.”
“대체 과장된 소문은 어떻게 된 거야?!”
손을 쓰기도 전에 소문이 저 정도 레벨까지 상승하다니, 내가 너무 소홀했던 탓도 있다. 최우선적으로 올리비아의 입부터 막았어야 했어!
“과장된 소문은 우리 학교에 곧 애가 태어날 거라고…….”
“단체로 소설 쓰지 마!”
“제목은 「하얗게 물든 강당 ~번식의 장소~ 」정도가 어떨까 회의하고 있을 거야.”
그건 야설이잖아?! 것보다 회의라니, 진짜로 쓰는 거냐!
“……주체자를 죽여버리겠어.”
나는 반 이상 진심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주체자는 보건 선생님이야.”
캔슬했다.
우리 학교의 보건 선생님은 작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온 풋풋한 여 선생님으로, 결코 무시 못 할 정도의 미인이시다.
그런 문화재와 같은 존재를 욕하다니 내가 몹쓸 녀석이다.
게다가 유리야 장난으로 한 말이겠지만, 정말로 선생님들의 귀에까지 그런 소문이 들어갔다면 나는 못해도 정학이다.
문제는 적어도 목을 맸다는 소문까지는 퍼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래? 사실 네가 해명하니까 올리비아도 별 충격 안 먹었어. 연기할 때 봤지?”
“그럼 문제없다는 거잖아.”
“근데 소문은 진짜로 퍼졌어. 회의에 참석하라고 이렇게 문자도 왔는걸.”
유리가 핸드폰 화면을 내게 보여줬다.
……진짜였다. 보낸 사람은 「보건샘」으로 되어 있었다.
나는 그걸 보자마자 팔로 머리를 싸맸다.
“망했어! 이제 아픈 척하고 보건실 가서 보건 선생님의 몸매는 구경하지 못 할 거야!”
“……변태! 지금 진지하게 얘기하잖아!”
유리가 윽박지르고 나서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나름의 방안을 생각해냈다. 아직도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고 있는 유리는 왠지 자기 가슴을 가리고 싶은 눈치였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말로 대꾸했다.
“일단 교실로 돌아가서는 안 되겠어.”
“어째서?”
대뜸 질문이 나오자 나는 유리에게 “쉿.”하고 손가락을 올려 보였다. 이제부터는 치밀한 계획을 실행해야 하므로 아무에게도 들켜서는 안 된다. 나는 목소리를 한층 낮추고 말했다.
“어딘가 숨을 곳을 찾자. 지금 교실로 돌아갔다가는 이상한 오해를 받을 것임이 분명해.”
유리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내가 손가락을 치우자 한동안 눈만 깜빡거렸지만 잠시 후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나는 왜?”
그 말에는 피식 웃으면서 답해줬다.
“힘들게 리허설을 끝냈는데 벌써부터 수업받고 싶어? 그렇다면 너는 정상이 아니야.”
그 말을 들으면서 유리는 고민하는 표정 한 번 짓지 않았다. 싫은 듯한 표정도 신기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변했다.
“나는 지극히 정상인 여자인걸.”
평소다운 청초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것으로 고작 1학년짜리 연극부원 둘의 무단결석 작전이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역시 회의다.
“좋은 의견이 있으면 말해주길 바래.”
우리는 서로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주체자는 나였지만 어느새 행동대장은 유리가 되어 있었다.
“음……. 그냥 계속 여기에 숨어 있는 건 어때? 누가 들어오면 숨죽이고 소파 아래에 숨는 거야.”
내가 나름 머리 굴린 작전을 설명하자, 유리는 팔짱을 풀지도 않은 채 혀를 쯧쯧 찼다.
“차라리 옷 벗고 미인계를 쓰라고 하지그래?”
“오, 그거 좋──.”
“물론 네가.”
나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
내가 그런 짓을 했다가는 정학감이다.
“실은 내가 더 좋은 방법을 생각해 놨어.”
유리가 그렇게 말했다.
“오, 정말 믿어도 되는 거야?”
“그렇게 물어볼 거면서 앞에 ‘오’는 왜 붙였어?”
유리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따지자, 나는 대뜸 즉답을 내놓았다.
“더 앞에 ‘아’가 빠졌어.”
그제야 납득이 갔는지 유리는 늦게나마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제 본격적인 회의가 시작된다.
“대충 이게 성공하면 우리는 핑곗거리도 만들 수 있어.”
“오오.”
그녀의 믿음직한 모습에 감탄한 나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유리가 씩 웃으면서 귀 좀 빌려달라고 손짓을 하길래, 나는 그녀에게 조금 더 다가가서 귀를 내밀었다.
그때 뭉클, 하고 유리의 가슴이 내 어깨와 접촉했다.
전혀 의도치 않은 것이었지만.
“……변태!”
찰싹.
일단 뺨부터 맞고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이유였지만 기분이 나빴다면 어쩔 수 없다.
모든 일에는「대가」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나는 기분이 좋았으니까 맞아도 불만할 권리가 없다.
“……크흠!”
유리는 경계를 늦추지 않고 화끈거리는 얼굴을 식히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계속 가슴에 민감해하는 모양인데, 그렇다고 해서 대놓고 두 팔로 가슴을 가리고 있는 모습은 내가 보기에도 상당히 안쓰러웠다.
자기 팔 위에 가슴이 올려져서 그게 한층 더 두드러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모른다. 나는 상당한 미안을 느꼈다.
“왜, 왜 계속 봐?”
어쩔 수 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급히 화제를 원상태로 돌렸다.
“그래서 결국 좋은 방법이란 건 뭔데? 이제 쉬는 시간이 끝나면 우리를 수색한답시고 반 애들이 신나서 난리를 칠 거야.”
말하면서 다시 눈이 마주치자, 유리가 불쾌한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내가 어쩌질 못해 몸을 움츠릴 때가 돼서야 그녀는 화가 조금 풀린 듯했다.
“비장의 카드가 있어.”
“그런 것도 다 준비하고, 너 처음부터 수업 빠질 작정이었지?”
“네가 닥치는 게 일단 최우선의 카드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최우선의 카드를 뽑자, 유리는 기세 좋게 핸드폰을 꺼내 들고서 굉장한 손놀림으로 빠르게 문자를 보냈다.
“「마녀님」을 이리로 부르는 거야.”
“웬 마녀님?”
마녀라면 익숙한 단어지만, 문자 하나 보낸다고 나타나는 흔한 존재는 아니다. 어떻든 전설 속에 나오는 그 마녀를 지칭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그때 문득 이 학교 어딘가에 웅크려 앉아 있을 한 사람이 떠올랐다.
나는 엄지와 검지를 위로 향해 보이면서 말했다.
“아, 혹시 그 녀석?”
“마녀님한테 ‘녀석’이라니 배짱이 상당한걸.”
유리가 확답을 내놓자 순간 어깨가 으스스 떨렸다.
자극해서는 안 되는 여자를 건드렸다고 나는 생각했다.
“야, 그 녀석의 연기를 방해해서는 안 돼!”
“알고 있어. 알고 있는데, 어……. 일단 우리가 비위를 맞춰 주면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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