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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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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급 매니저, 여동생담당 우연하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Cloud9
글쓴이: 카라모란
작성일: 11-10-15 23:58 조회: 4,608 추천: 0 비추천: 0

의자에 앉은 사내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달빛은 눈이 아플 정도로 푸르렀다.
어두운 보랏빛으로 물든 하늘을 가로지르는 별의 강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대고 있었다.
“이렇게 시작되어버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들려온 것은, 여리지만 세이렌의 노랫소리와 같은 마력을 지닌 목소리였다.
상념에서 깨어난 사내는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
방 한구석의 어둠 속에서 한 소녀가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내의 시선이 자신을 향했는데도 그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흐드러진 금발 아래로 비치는 생기 없는 표정과 창백한 피부 덕에, 작은 몸을 휘감은 검은 원피스가 마치 상복처럼 보였다.
“몸은 괜찮나?”
“저에게는 오히려 득이 되는 일이니까요.”
“다행이군.”
“염치없는 말이겠지만, 조금만 더 도와주세요.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요.”
생기 없는 표정과는 달리, 소녀의 앳된 목소리에는 감정이 한껏 실려 있었다. 어린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애절함과 안타까움이 듣는 이의 마음을 술렁이게 할 정도였다.
“이 일로 네가 사과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너와 나의 근원은 같지. 그러니 앞으로의 일이 곤란하게 되었다고 해도, 현재 상황 자체는 내게도 무척이나 기쁜 일이다.”
“생각을 바꾸신 건가요?”
소녀의 물음에 사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차갑게 굳어진 얼굴에 드리워진 피로감은, 사내가 생각을 바꾸지 못한 것이 간단한 결정이 아니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럴 수는 없겠지. 지금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지금 당장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 아니면 이 구차한 생을 좀 더 이어갈지 뿐이니까.”
“구차하지 않아요. 그 누구도 당신의 생을 구차하다고 말할 수 없어요. 설령 그라 해도.”
“…고맙군.”
사내는 소녀를 향해 살짝 웃어보이고는 이내 다시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녀는 문득 걱정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사내의 웃음이 너무나도 지치고 피로해보여서, 그가 마치 구름조차 뒤덮지 못한 달빛에 녹아 사라져버릴 것처럼 느껴졌다.
“……?”
달칵―
소녀가 입을 열려던 순간, 사내가 바라보고 있던 커다란 창문이 활짝 열리며 쾌활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센티멘털한 표정들이네? 뭐야, 파릇파릇한 봄날부터 가을남자 놀이라도 해?”
열려진 창문을 통해 차가운 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품질 좋은 꿀과 같이 투명감이 느껴지는 황금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새하얀 옷자락이 창문 밖으로 드러난 어둠을 가렸다.
이질적으로 느껴질 만큼이나 선명한 푸른색의 눈동자가 사내와 소녀에게 시선을 던졌다.
금발의 청년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한 걸음을 내딛었다. 서구적인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중국식의 새하얀 장포자락이 걸음에 맞춰 흔들렸다.
마치 평지를 걷는 것처럼 느긋한 걸음으로 허공을 딛고 걸어온 청년은, 창문을 통해 방 안으로 들어와 창틀에 걸터앉았다.
“젊은 녀석들이 뭐가 그렇게 우울해서 그래?”
청년은 섬뜩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의 용모는 조금 더 성숙하고 다소 남성적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소녀와 매우 닮아있었다. 하지만 그 둘이 지닌 아름다움의 종류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아직 미성숙하다는 점을 포함해, 소녀는 아름다웠다. 마치 장인에 의해 빚어진 예술품처럼 균형 잡힌 아름다움이었다.
하지만 사내의 아름다움은 질 자체가 소녀의 것과는 달랐다. 인간을 유혹하는 마물이나 요괴와도 같은, 결코 인간이 가질 수 없는 아름다움을 그는 가지고 있었다.
용모도 움직임도 비현실적으로 보일 정도의 아름다움.
그런 사내에게 현실감을 부여해주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인간적인 표정과 가벼운 말투였다.
“어이, 슬슬 정신 좀 차리지?”
“…죄, 죄송합니다..”
사내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청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청년과 사내의 연배는 비슷해보였지만 청년이 편하게 말을 놓고 있는 것에 비해 사내의 태도는 무척이나 깍듯했다.
그런 그의 태도가 그다지 달갑지 않았는지, 청년은 사내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편하게 해, 편하게.”
“…아, 예.”
사내는 조금 머뭇거리면서 고개를 들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청년은, 뒤에서 멀뚱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소녀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근데 편하게 하는 건 좋은데, 그래도 인사정도는 해라.”
“…….”
소녀는 대답대신, 싸늘한 눈초리로 청년을 노려보았다.
청년의 입가에 어렴풋하게 걸려있던 미소가 좀 더 뚜렷하게 드러났다.
“안녕하셨나보군요.”
모로 들어도 인사라고 하기에는 뭣한 태도였다. 하지만 소녀는 청년의 반응조차 확인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방에서 나가버렸다.
쾅-!
큰소리를 내며 문이 거칠게 닫혔다.
평소에 소녀가 보이던 우아하고 점잖은 태도와는 전혀 상반된 태도였다. 청년이, 혹은 청년이 하는 행동이 꽤나 마음에 들지 않은 듯했다.
그래도 좋게 말하면 새침한 태도라고 하겠지만, 사실은 건방지다고 밖에는 할 수 없는 행동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죄송합니다. 이곳을 떠나게 되어 조금 토라져 있는 것 같습니다.”
“아아, 걱정하지 마. 얌전한척 내숭떠는 꼬마는 딱 질색이니까. 까칠해도 저 정도 솔직한 게 딱 귀엽지.”
청년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이 웃어보였다.
“감사합니다.”
“아니, 뭐. 감사할 것까진 없고…. 어차피 나가는 김에 부탁이나 하나 들어줬으면 해서 말이지.”
“부탁… 말입니까?”
“그래.”
사내의 얼굴에 의아함이 어렸다. 그가 알기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 중 청년에게 불가능한 일 따위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고…,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 녀석 좀 한 번 데리고 와달라고."
“…그를 여기로?”
“응. 이왕이면 완전히 깨어나기 전인 게 더 좋고. 아, 그래. 그 대신이라고 하기는 뭣하지만, 보상으로 여길 주지.”
“이 곳을…?”
청년은 사내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상체를 살짝 틀어 창틀에 몸을 기대어 앉았다.
창문 바깥으로는 이미 짙은 어둠이 내려 앉아있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숲은 그림자들의 군집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숲 전체를 휘감아 흐르는 짙은 안개는 나무그림자의 형태도, 숲 전체의 모습도 모호하게 일그러뜨렸다.
말 그대로 수해(樹海)라고 밖에는 칭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꽤 좋은 곳이지 여기는?”
“예, 아마도 저희에게 있어서 이 이상 가는 땅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어때?”
“…….”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수해 한복판의 저택은, 입지가 좋다고는 빈말로도 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사내와 소녀에게는 어렴풋한 그림자 속에 자리 잡은 이 땅만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때문에 청년의 제안은 지나칠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그런 좋은 제안을 받으면서도 사내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언제나 큰 대가에는 그에 상응하는 조건이 붙어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청년의 얼굴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
보는 이의 마음을 요동치게 하는 그 미소는 지나치게 청년의 용모에 걸맞았다. 인간답지 않은 아름다움과 더없이 인간다운 태도의 괴리에서 생겨난 현실감이 단숨에 사그라졌다.
비현실이 현실을 밀어내는 모습에 사내의 마음이 술렁였다.
그래서 청년의 입이 열리는 순간, 사내는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다시금 생겨나는 괴리가 사내의 마음을 편하게 했다.
“우리 아가씨가 그 녀석을 마음에 들어 하거든. 근데 난 어디까지나 휴가 중인 몸인데다, 여긴 내 구역이 아니라서 너무 활개치고 다니기는 미안해서 말이지.”
“…알겠습니다.”
“나쁜 짓하려는 거 아니니까 걱정할 거 없어. 정 걱정스럽다면…. 그래! 내 존재의 의의를 걸고 녀석에게 손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지.”
“아, 아닙니다! 그러실 필요까지는…”
이렇게 되자 당황하는 것은 오히려 사내 쪽이었다.
사내나 청년과 같은 자들에게 있어서 존재를 건다는 것은, 입으로만 떠들어대면 충분한 허풍 같은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존재의 의의를 건다는 것은 만약의 경우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뜻이었다. 태어나면서 주어진 모든 것과 살아가면서 쌓아올린 모든 것, 죽음으로서 얻게 될 모든 것을.
그만큼 상대에게 존재의 의의를 걸라고 말하는 것은 엄청난 무례였다.
하지만 상대가 먼저 그런 얘기를 꺼내게 하는 것 역시 무례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상대 쪽에서 그런 말을 꺼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심각하게 불신하는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나 다름이 없어서였다.
“아아, 너무 심각해할 필요 없어. 어차피 약속만 안 깨면 뭘 걸든 상관없으니까, 아무래도 좋잖아?”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웬만하면 가능할 때까지는 좀 잘해주라고. 그래도 꽤 불쌍하잖아, 그 녀석?”
청년은 앉은 채로 긴 다리를 가볍게 뻗으며 창문틀에서 일어났다.
걸음을 옮기는 그는 분명 이 방 안에 서 있음에도, 마치 주변의 공기와는 괴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이질감을 씻어내기라도 하듯이 청년은 싱긋 웃어보였다.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와 같은 뒤끝 없이 쾌활한, 무척이나 인간적인 미소였다.
“Il n'y a que le premier pas qui difficult.”
(힘든 건 처음의 한 걸음 뿐이니까.)
“……?”
“급한 거 아니니까, 서서 인상 구기지 말고 편하게 앉아서 생각해. 여하튼 웬만하면 긍정인 대답이면 좋겠네.”
“…생각 …해두겠습니다.”
느긋한 걸음으로 방을 나서는 청년을 향해 사내는 가볍게 고개만을 숙여 목례했다. 보통이라면 직각으로 인사했겠지만, 청년이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였다.
문 앞까지 도달한 청년은 잠시 자리에 멈춰 섰다.
청년은 한 손으로는 문고리를 잡아 문을 반쯤 연 채로, 고개만을 돌려 사내를 향해 싱긋 웃어보였다.
“그럼 좋은 밤 보내라고. 아, 인사는 됐어.”
“……”

문이 열리는 소리도 닫히는 소리도 전혀 나지 않았다.
청년은 분명히 문을 통해서 나갔지만, 사내는 왠지 혼란스러워졌다. 마치 눈앞에 있던 청년이 갑자기 연기처럼 사라져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
홀로 남은 사내는 지친 듯한 표정으로 의자에 걸터앉았다.
망연히 앉아있는 사이, 활짝 열린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온 차가운 밤바람이 사내의 얼굴을 할퀴었다.
사내는 창문을 닫지 않았다. 아니, 창문을 닫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멍하니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던 그가 문득 중얼거렸다.
“Je sais.”
(나도 알아.)
사내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검은 새인지, 커다란 박쥐인지 알 수 없는 크고 검은 그림자가 창밖을 날고 있었다. 그림자는 황금빛 안광을 줄기줄기 뿌리며 어두운 숲 너머로 날아가고 있었다.
밤의 어둠보다도 더 짙은 어둠이 잿빛으로 저물어가는 숲을 뒤덮어가고 있었다.
“Je ne l'oublie pas. L'espoir fait vivre, mais le dsespoir aussi.”
(잊지 않았어. 희망은 사람을 살게 하지만, 절망 역시 마찬가지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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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의 어둠을 가르고, 은빛 섬광이 날아들었다.
“뭐야?!”
덩치 큰 소년은 체구가 무색할 정도로 빠르게 몸을 비틀었다.
한껏 젖혀진 어깨 위로 칼날이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갔다. 팔을 휘두르는 원심력에 등에 멘 백팩의 무게가 더해져서인지 척추가 비명을 질렀다.
흰색 면 헤어밴드로 정리된 제법 긴 적갈색의 머리카락은, 몇 가닥쯤 잘려져 허공에 흩날렸다.
“칫!”
왜소한 사내의 입에서 짧게 혀를 차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정확하게 목을 노리고 칼을 휘둘렀음에도 불구하고, 어깨조차 베어내지 못한 탓이었다.
그가 아쉬워하거나 말거나, 소년은 몸을 일으키려 했다.
시라사야0-1)의 자루를 쥔 사내의 손에 재차 힘이 들어갔다.
사내의 손에 쥐어진 시라사야가 호선을 그리며 허공에서 자연스럽게 방향을 틀었다.
이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는 사내의 움직임과 함께, 칼날은 소년의 목줄기를 노리고 수평으로 그어져왔다.
당황한 소년은 다시 잽싸게 고개를 뒤로 젖혔다.
소년은 눈을 힐끗 돌려 날아오는 칼날의 궤도를 재확인했다. 그리고는 조금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그대로 기울어진 어깨를 뒤로 당기며 몸 전체를 뒤로 젖혀버렸다.
피이잉―
공기를 찢는 소리와 함께 도첨0-2)이 소년의 이마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갔다.
허공에 내던져진 은빛 도신은 그대로 허공에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방향을 바꿨다. 도는 마치 브릿지0-3)라도 하는 마냥 몸을 둥글게 휘고 있는 소년의 허리께를 사선으로 내리 그었다.
섬뜩한 예기가 감도는 은빛의 칼날이 당장이라도 소년의 몸을 두 동강 낼 것처럼 보였다.
캉-!
“크윽!”
칼날은 소년의 허리를 베기도 전에, 거친 금속음과 함께 허공에서 크게 흔들렸다.
몸을 뒤로 젖히고 있던 소년이 그대로 한쪽 발을 들어 올려 도신을 걷어 차버린 것이었다.
몸이 뒤로 기울어진 채로 발을 들어 올린 덕분에 소년은 균형을 잃으며 양 팔을 뻗어 땅을 짚었다. 그리고는 아직 땅에 닿아있는 한쪽 발로 거칠게 바닥을 차듯이 디디면서 백덤블링해서 몸을 일으켰다.
“읏차.”
소년이 몸을 일으키자, 이마를 가리고 있던 헤어밴드가 반으로 잘라지며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마에는 매끈하니 상처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칫!”
다행히도 사내의 완력이나 악력은 체구와 비례했는지, 시라사야를 쥔 그의 손이 팔꿈치까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소년을 노려보는 눈빛만은 여전히 형형했다.
사내의 상태를 확인한 소년은 그대로 사내를 향해 몸을 날리렸다.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소년의 모습에, 사내는 한쪽 손으로 가볍게 시라사야의 도신을 쓸어내렸다.
이내 도신 전체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흘러나왔다.
도신 위에서 불꽃처럼 일렁이던 빛은 허공에서 가닥가닥 얽혀들어, 어른 팔뚝 정도 크기의 길쭉한 화살 형태를 이루었다. 말 그대로 빛으로 이루어진 화살이었다.
빛의 화살에서 알 수 없는 불길함을 느낀 소년은 달려 나가던 자세 그대로 앞으로 쓰러지듯이 몸을 숙였다.
허공에 떠올랐던 커다란 빛의 화살이 순식간에 소년을 쏘아져나갔다. 마치 유성꼬리 같은 잔상을 남기며 날아간 빛의 화살은, 소년의 등에 매어진 가방 표면을 살짝 찢으며 지나갔다.
“으엑! 내 가방!”
쾅-! 콰광-!
가방의 상처에 애도를 표하던 소년은, 등 뒤에서 들려온 폭발음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라사야를 들고는 있지만, 사내가 마술사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은 대강 예상하고 있었던 바였다. 하지만 아무리 공원에 사람이 없다고는 해도, 저런 식으로 뒤처리가 곤란해질 공격을 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 탓이었다.
으직- 으지지직― 쿠궁――!
기둥 폭이 어른 손 반 뼘쯤 되는 나무는, 위쪽 가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부러져 나갔다.
소년은 그 모습을 확인할 새도 없이 바닥을 굴렀다.
어느새 시라사야 위에는 또 다른 화살들이 만들어져 있었다. 빛 화살의 개수나 크기는 조정할 수 있는 것인지, 이번에는 연필 크기 정도의 빛 화살 4개가 허공에 떠 있었다.
빛의 화살들이 소년을 향해 쏘아져나갔다.
쾅-! 쾅-! 쾅-! 쾅-!
작지만 날카로운 폭발음과 함께, 소년이 굴러간 땅 위에 작은 크레이터 같은 구멍들이 줄줄이 생겨났다.
바닥을 구르는 소년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속도가 그다지 빠르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지, 한 대만 잘못 맞아도 단박에 저세상으로 갈 수 있을 정도의 파괴력이었다.
연달아 들리던 폭발음이 나와야할 순간에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자, 소년은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소년의 눈앞으로 빛줄기가 날아들었다.
잽싸게 몸을 날린 소년은,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벤치 뒤로 몸을 숨겼다.
쾅-!
“빌어먹을!”
벤치의 몸체를 이룬 두꺼운 나무판이 한 방에 반파되었다.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그대로 쪼개져버릴 것 같은 꼴이었지만, 다행히 등받이 안쪽에는 철심이 대어져 있었다.
벤치 뒤에 자리를 잡은 소년은 인상을 찌푸리며 사내를 면밀히 살펴보았다.
나이는 아마도 30대 중반 정도. 왜소하고 마른 체구에 가무잡잡한 피부와 광대뼈가 두드러지고 턱이 좁은 얼굴. 무엇보다 꽤나 성질 더러워 보이는 눈초리를 하고 있었다.
동양인인 것만은 확실했지만 왠지 한국인이라기에는 조금 이질적인 얼굴이기도 했다.
물론 외모나 분위기로 따졌을 때는 물론, 현재로서 등장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은 일본인이었다. 하지만 소년을 노리는 사람은 세계 각지에 널려있는데다, 외모만 가지고 국가를 판단하려고 애를 쓰는 것은 꽤나 무모한 짓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지금 당장 단정을 내리려고 애를 쓸 필요가 없기도 했다. 출신국을 알았다고 공략방법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
그 때였다.
사내가 잠시 공격을 멈춘 순간, 소년은 잽싸게 벤치 뒤에서 일어났다.
빛을 뿜던 도신에서 어느새 빛이 거의 사라져 있었다. 어렴풋이 푸른빛이 어른거리기는 했지만, 자세히 보지 않으면 빛나고 있다는 것도 알기 어려울 정도였다.
“……?!”
벤치 앞으로 한 걸음 달려 나가려던 소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느새 사내의 시라사야에는 처음보다도 더 강렬한 빛이 머금어져 있었다. 그리고 처음의 것보다는 약간 작지만 여전히 커다란 두 개의 빛 화살이 소년을 향해 쏘아져 나오고 있었다.
“우왓!”
소년은 다시 벤치 뒤로 뛰어들면서, 메고 있던 가방을 날아오는 빛의 화살을 향해 내던졌다.
콰광―!
가방과 격돌한 빛의 화살 하나가 거세게 폭발했다.
갈기갈기 찢어진 종잇조각들이 허공을 날았다. 친구에게 빌렸던 노트가 들어있었다는 사실이 떠오른 소년은 순간적으로 인상을 찌푸렸지만, 여유를 부릴 새는 없었다.
“으엑…?!”
콰지직―
또 하나의 빛의 화살은, 소년의 기대대로 벤치에 부딪쳐 폭발하지는 않았다.
빛의 화살은 벤치 등받이에 아슬아슬하게 남은 판자를 그대로 부숴버렸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대로 철심 사이를 지나쳐 소년에게로 날아들었다.
퍼엉-!
“으아아악!”
소년의 비명소리에, 사내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하지만 부서져버린 벤치 뒤에서 뛰쳐나오는 소년의 모습에 그의 미소는 이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젠장! 아프다고, 이 거지같은 새끼야!”
악을 쓰는 소년의 팔뚝은 온통 피투성이에 나무파편들까지 박혀있었다. 하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얼굴이나 어깨에는 상처가 거의 없었다.
“끼야아아아아아앗!”
비명 같은 기합 지른 사내의 시라사야에서 빛 화살이 다시 한 번 쏘아졌다.
소년은 그것을 피하는 대신 왼손을 휘둘러 쳐냈다.
퍼엉-!
소년의 손에 부딪친 빛의 화살은 여지없이 폭발했다.
손이 폭발력에 의해 튕겨나갔다. 팔만이 아니라 어깨와 상체까지 크게 밀려날 정도의 폭발이었지만,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는지, 피가 튀거나 하지는 않았다.
휘청거린 덕분에 다소 주춤거리기는 했지만, 달려 나가는 소년의 기세는 여전히 약하지 않았다.
“큭!”
“치료비도 안 주는 놈들이 꼭 지랄이야!”
사내는 맹렬하게 달려드는 소년의 기세에 놀라 한 발짝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하지만 소년은 그보다 한 발 빨랐다.
양 어깨가 앞을 향하게 웅크리며 최대한 몸을 앞으로 숙인 소년은,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사내의 품 안으로 순식간에 파고 들어갔다.
“……!”
사내는 재빠르게 몸을 뒤로 날렸다.
하지만 소년쪽이 더 빨랐다. 척추에 용수철이라도 심은 마냥 몸을 튕겨내듯 일으켜 세운 소년의 팔이 사내의 얼굴을 뒤쫓아 가듯 내뻗어졌다.
소년의 오른손바닥 아랫부분이 사내의 턱 밑에 닿았다.
아니, 사내가 닿았다고 생각한 순간, 그 손은 급하게 가속하며 사내의 턱을 밀어 올리듯 가격했다.
“컥…”
우득-
턱뼈가 관절을 벗어나 뒤틀리는 느낌과 함께, 사내의 목에서 불길한 소리가 울렸다. 소년의 손에 의해 밀려난 사내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털썩-!
둔탁한 소리와 함께, 사내는 허공을 날듯이 튕겨나가 등부터 땅에 떨어졌다.
달려드는 속도와 사내보다 큰 키를 이용한 소년의 공격이 절묘하게 맞아 들어간 결과였다. 물론 체격과 근력이 압도적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소년은 오른쪽 주먹을 몇 번 쥐었다 펴보았다. 주먹을 쥔 채로 손목을 몇 번 돌려보던 소년은 히죽 웃으며 중얼거렸다.
“뭐, 이 정도면 병원은 안 가도… 될라나?”
놀랍게도 소년의 손은 약간 붉게 달아올라있을 뿐, 별다른 상처 같은 것은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나무를 부러뜨리고 땅에 구멍이 파일 정도였던 빛의 화살의 파괴력을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였다.
“…으엑, 완전 거지같네, 진짜.”
인상을 찌푸린 소년은 팔뚝에 박힌 벤치의 파편들을 손으로 대강 뽑아내며 욕설을 내뱉었다.
말 그대로 겁나 아팠다.
물론 소년은 체격도 좋았고 싸움박질에도 이골이 나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들보다 통증을 덜 느끼는 체질인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팔뚝에 나뭇조각이 박히면 아플 수밖에 없었다.
아니, 아픈 게 정상이었다.
“으에… 엘렌한테 혼나겠네….”
멍하니 중얼거리던 소년은 피 묻은 손가락으로 목덜미를 긁적였다.
그러다가 교복 목깃에 피가 묻었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잠시 손가락을 멈췄다. 하지만 이미 교복이 회생 불능 상태라는 사실을 재차 깨닫고는 다시 한 번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전의 싸움이 무색할 정도로 소시민적인 태도였다.
소년은 웬만한 어른들보다도 덩치가 컸지만, 얼굴만은 그렇지가 않았다. 둥글고 앳된 얼굴과 눈초리가 처진 커다란 눈이 온순해 보이기 짝이 없었다.
그나마 전투 중에는 흥분과 짜증으로 표정이 일그러져 다소 위압감이 있었다. 하지만 독기가 풀려버린 지금은 오히려 덩치에서 오는 위압감마저 상쇄시키는 듯한 인상이었다.
“끄으윽…”
쓰러져있던 사내의 입에서 흘러나온 신음 소리에, 소년의 시선이 사내에게로 옮겨갔다.
입에 게거품을 문 채 기절한 사내는 작은 신음소리를 흘리며 발작적으로 팔과 다리를 떨어대고 있었다. 부러진 목뼈나 뒤틀린 목 근육에 신경이 압박된 상태인 것 같았다.
깨어나면 여러 가지 의미에서 죽고 싶어질 테니, 차라리 의식을 잃은 게 다행일지도 몰랐다.
사내를 내려다보던 소년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나, 빌어먹을. 진짜… 이걸 그냥 버리고 갈 수도 없고…. 거지같네, 진짜.”
차라리 죽었으면 그냥 버리고 튀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소년은 양심이 좀 썩기는 했지만, 사람이 죽는 것―심지어 자신 때문에―을 간과할 정도로 차가운 성격도 아니었다.
“으음… 이걸 어쩐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나 때릴 때의 감촉으로 봐서, 사내의 턱뼈는 평생가야 제자리 찾기 어려울 정도로는 박살이 난 것 같았다.
아니, 확실히 박살났다.
하지만 소년이 걱정하는 것은 사내의 턱 보다는 경추0-4)와 뇌 쪽이었다.
소년이 사용한 기술 제대로 걸리면 경추가 부러지는 것은 기본이었다. 게다가 턱 뼈에서부터 시작된 진동이 뇌를 흔들어서 뇌진탕까지 유발하는 기술이기도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내가 반신불수가 되거나 하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소년은 자신을 공격한 사람의 안위까지 걱정해 줄만큼 친절하지 않았다. 그저 살인자가 되기는 싫었기 때문에, 그저 죽지만 않으면 좋겠다는 정도의 얄팍한 걱정을 하고 있었다.
“……!”
한참을 고민하던 소년은 쪼그리고 앉아서, 사내의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았다.
사내의 주머니를 뒤지는 소년의 손길은 꽤나 조심스러웠다. 괜히 잘못 흔들었다가 뇌진탕이 도져서 죽기라도 하면 꿈자리가 사나울 것 같아서였다.
소년의 손끝에 플라스틱 재질의 단단한 무언가가 잡혔다.
“나이스!”
사내의 주머니 속에서 자신이 원하던 것을 발견한 소년은 조심스럽게 그것을 꺼냈다.
“얘네는 무슨 핸드폰을 10년씩 쓰나….”
소년이 찾아낸 핸드폰은 슬라이드 폰임에도 불구하고 스마트폰 사이즈에 필적했다. 소년은 미묘한 표정으로 핸드폰의 슬라이드를 밀어 열었다.
통화버튼을 누르자, 통화목록에 한자와 가타가나가 빽빽하게 들어찼다.
“일본인인가?”
소년이 학교에서 배우는 제2외국어는 안타깝게도 중국어였다. 하지만 일단 지금 통화목록에 뜨는 글자들이 일본어라는 것을 알기에는 충분했다.
잠시 통화목록을 내려 보던 소년은 일단 가장 많이 통화한 번호를 확인했다. 001-810-5)로 시작하는 핸드폰번호는, 최근 들어 상대들의 핸드폰에서 몇 번이나 확인했던 번호였다.
물론 그만큼 소년에게도 꽤나 익숙한 번호였다.
‘역시 그 녀석 부하로군.’ 따위의 말을 중얼거리던 소년은 핸드폰의 통화버튼을 눌렀다.
“아 썅, 또 일본어로 쫑알대는 거 아냐, 이거?”

띠- 띠―― 띠――― 툭-
기묘한 기계음과 같은 착신음과 함께 통화가 연결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もしもし?]
“지랄.”
소년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사내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또 실패했나보군요.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그렇지, 뭐. 그나저나 이쯤 됐으면 내가 전화 걸었을 때부터, 파바밧-! 하고 한국어로 반응해주지 그래?”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긴 합니다만, 사원들이 실제로 행동에 나서는 시간까지 일일이 조율하기는 어려워서 조금 곤란합니다.]
소년의 도발적인 어조에도, 수화기 건너편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섞여있었다.
게다가 토종 한국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훌륭한 한국어였다. 일본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완벽한 한국어 덕분에, 오히려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나저나 그렇게 귀찮으시다면 그냥 119를 부르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소년의 머릿속으로 강적이라는 두 글자가 스쳐지나갔다.
도대체가 얻어맞고 나자빠진 건 그쪽의 부하인데도 불구하고 사내의 태도가 지나치게 태연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나마도 처음이 아니었기에, 소년은 마찬가지로 태연하게 받아넘길 수 있었다.
“턱뼈랑 경추도 두 대는 나간 거 같고, 뇌진탕 정도? 어쩌면 두개골 골절도 조금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괜히 119같은 거 불렀다가 유치장 들어갔다 나오게 되면 곤란하니까 니들 선에서 알아서 해결해.”
[9천(天)의 이름은 생각하시는 것만큼 녹록하지 않습니다. 부담 없이 전화하시지 그러십니까?]
“어떻게든 내보내주기야 하겠지만, 확인될 때까지는 경찰들한테 구박받아야 될 거 아냐. 난 모범생이라고.”
[…저희 쪽 자료 중에는 성적표도 있습니다만?]
“Shut up.”
[……]
별걸 다 알아간다고 해야 할지, 도대체 그런 쓸데없는 정보는 뭐에다 쓰려고 모은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남의 프라이버시 침해는 적당히 하고, 쫄따구나 보내.”
[쫄따구라니요…. 아무리 남의 사원이라고 하지만 지나치게 무례하시군요. 그리고 그를 수습할 의료팀은 이미 파견해뒀습니다. 5분 이내에 도착할 테니, 충돌을 일으키고 싶지 않으시다면 미리 자리를 피해주시는 게 어떠십니까?]
중간보스의 발언 치고는 꽤나 상냥한 말이었다.
“맨날 이렇게 삽질을 할 거면 번거롭게 하지 말고, 아예 뒤처리 책임자까지 하나씩 딸려서 보내지 그러냐?”
[흐음…, 한국인들은 일하는 걸 지나치게 좋아하지요. 그래서인지 꽤나 감성이 풍부한 민족인데도 불구하고, 일에 관련해서는 그런 식으로 효율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 해보신적 없습니까?]
사내는 꽤나 심각한 어조로 답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한국인의 습성적 기이함이나 성격적 부덕함을 매도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지금 상황에서 소년이 선택한 바를, 자신의 생각으로 담담히 풀어낸 것뿐이었다.
[물론 스스로도 잘 알고 계시겠지만, 인간에게는 자존심이라고 하는 비이성적인 사고가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아, 물론 긍정적인 쪽은 자신감이라고 말해야겠지요.]
“그래서 뭐, 어쩌라고?”
[쿡, 남자의 자존심이라는 것은 개괄적인 의미에서의 인간의 자존심보다는 조금 강한 독립성을 가지기 마련입니다. 게다가 특히 현존하고 있는 일본의 마술사들, 특히 검을 사용하는 자들은 스스로를 무사(武士)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좀 짧게 하지?”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태도를 좀 더 기르셔야하겠군요…. 어쨌든 그 정도로 자존심이 강한 자들에게 ‘당신이 이기지 못했을 때를 대비해서 사람을 붙여두겠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뜻입니다. 물론 일반적인 경우에도 충분히 실례되는 태도라고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소년은 전화 너머의 사내가 지금 눈앞에 있다면 한 대 때려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예의 챙기는 놈이 나한테는 왜 그렇게 까대는데?!”
[무사는커녕, 평범한 인간조차도 아니신 분께 인간의 예의를 찾을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일단 저희는 청부업자고, 당신은 청부대상이라는 게 가장 중요하겠지만요.]
“……?”
소년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하지만 소년에게는 수화기 건너편의 상대를 주살0-6)할 능력 따위는 없었기 때문에, 참는 것 외에는 별 수도 없었다.
“좀 더 신사적인 태도로 우호적 관계를 지속시켜보겠다는 생각은 없어?”
[그거 유감이군요.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충만하지만, 어른의 세계라는 게 생각보다 만만치 않아서 말입니다. 어릴 때가 좋았다는 생각은 종종 해보셨을 텐데요?]
“아니, 별로.”
[그런가요? …하기는 당신이라면 인간이 아니더라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또 뭐가?”
[후훗, 그 앳된 얼굴이 치욕감으로 물들어서 제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기대되는군요. 지금까지 회사에 입힌 피해만큼 충분한 체벌을 드리지요.]
소년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진검을 휘두르는 상대와 싸울 때보다도 더 공포스러웠다.
왠지 자기만 바보가 되는 느낌에 소년은 인상을 찌푸렸다.
바보가 되든 어쩌든 간에, 이 상황에서 입을 다물면 왠지 지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새삼 기분을 정리한 소년은 으르렁거림을 섞어 사내에게 말했다.
“…변태새끼.”
[변태라니 너무하십니다. 애초에는 당신께 당했던 자들에게 처분을 맡겨볼까 했지만, 너무 가혹한 것 같아서 저 혼자 하는 쪽으로 바꾼 겁니다만…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가혹하고 자시고 간에 좀 닥쳐!”
[……]
“……?”
소년이 신경질적으로 외치자, 수화기 건너의 사내가 침묵했다.
그 침묵이 왠지 불안하다고 느낀 소년이 입을 열려는 순간, 수화기 건너편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조금 고조된 듯한 사내의 목소리가 이어서 들려왔다.
[쿡쿡, 여전히 좋은 반응이군요. 당신과 저 사이에 이렇게 서먹하게 굴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사이는 개뿔. 장난 하냐? 쥐똥만큼도 관계없는 완전 남이거든?”
[너무하시는군요.]
“너무한 건 너잖아! 차라리 처음에처럼 그냥 깔끔하게 죽이는 쪽으로 노선 좀 변경해주면 안되겠냐? 응?”
이 미친 변태 쪽바리 새꺄! 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소년은, 상대가 앞에 없는데도 괜한 억지 미소가 지어지는 입가를 애써 끌어내렸다.
소년이 일본인들에 대한 악감정을 가지고 있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식민사관이라든가 독도문제라든가 이런저런 문제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국가 간의 문제지 일본인 개개인을 평가할 잣대는 아니었다.
물론 소년이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결국 소년은 일본에 별 악감정이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내를 보고 있노라면 정말로 일본인 중에는 변태가 많은가 하는 편견이 생길 정도였다.
물론 소년은 고작 사내 한 명의 행동을 가지고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를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하핫, 저를 너무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가시는군요. 하지만 죽이려던 상대라도 취향에 맞으면 사이좋게 이야기 정도는 나눌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르고 싶다는 생각이 종종 들기는 했지만.
“나눌 수 없어! 없다고! 너만 있어! 그러니까 좀 닥쳐! 자꾸 개소리하면 진짜 죽여 버릴 테니까!”
[흐음,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계시군요. 정보 제공 감사드립니다. 게다가 저를 죽이기 위해 일본까지 와주시겠다니, 말 그대로 대출혈 서비스군요. 코피가 터질 지경입니다.]
“이따위 대화에서 정보 얻지 마!”
소년은 왠지 세상이 무서움을 엿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정말로 정조 위협이라든가 SM의 길로 빠질 위험성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내가 사디스트라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가 자신에게 이런 농담을 해대는 것은 그저 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반복적 세뇌를 통한 정신세계의 붕괴에 대한 위협이 느껴진다는 점이 미묘한 공포였다.
“아, 난 몰라. 모르니까 멋대로 지껄이셔. 끊는다.”
[그러시지요. 그럼 얼마 남지 않은 시간동안만이라도 좋은 시간 보내시길 기원하겠습니다.]
“야!”
[아, 그리고 제가 말하기는 좀 우스운 이야기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사람의 호의라는 걸 너무 믿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인생이라는 게 워낙에 만만치 않은 거잖습니까?]
“개소리 말고 꺼져!”
탁!
수화기에다 대고 비명처럼 소리를 내지른 소년은 소리가 날 정도로 슬라이드를 거세게 닫았다. 그리고는 아직도 뻗어있는 사내의 옆에 핸드폰을 던져버렸다.
기본적으로 일본계의 주술은 공격보다는 추적이나 은신, 포박과 같은 잡기0-7)에 강한 편이었다.
괜히 핸드폰을 들고 가기라도 했다가 사무실에 요상한 것이 들러붙어가게 되면 그건 또 그거 나름대로 골치 아픈 일이었다.
게다가 사내는 부하에게 필요 이상의 정보를 알려줄 정도로 어수룩한 사람이 아니니, 파헤칠 것도 없을 게 뻔했다.
물론 그 핸드폰이 소년의 물욕을 자극하지 못하는 것도 한몫했다. 출시된 지 최하 10년은 되어 보이는 그 핸드폰은, 그나마도 없는 소년에게조차 외면당했다.
“하여간… 아우으으, 존나 거지같네. 저 거지같은 새끼들은 왜 번갈아가면서 가방을 찢어먹고 지랄이래?”
자리에서 일어난 소년은 허리에 손을 짚고 등을 쭉 펴며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소년은 고작 3일 전에 이번과 비슷한 이유로 가방을 바꾼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번에는 큰맘 먹고 케네스콜에서 40만원 가까이 되는 백팩을 질러놨다는 게 지난번과 조금 다른 상황이었을 뿐이었다.
지난번의 인조가죽으로 된 5만원짜리가 그랬듯이 진짜 소가죽으로 된 40만원짜리 백팩 역시 마술은 막아내지 못했다.
사실은 막아내면 그게 더 신기한 일이었지만.
아쉬움의 한숨을 내쉰 소년은 바닥에 내팽개쳐진 공책과 백팩의 잔해들을 주워 모았다.
무려 40만원짜리 가죽걸레와 친구들의 원한이 담긴―정확히는 내일 쯤 시우의 친구들로 하여금 질풍노도의 시기에 어울리는 분노를 표출하게 만들― 휴지조각들이었다.
“……?”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니 벌써 6시가 넘어있었다.
저녁시간은 7시. 밖에서 습격을 받았거나 말거나, 저녁식사가 늦어졌다가는 그것만으로도 또 잔소리가 한바탕 쏟아질 게 뻔했다.
“젠장…, 시간도 없는데 아침에 먹던 거 꺼내놔야 되나…. 진짜 무슨 내가 식모도 아니고….”

주)----------------------------------

0-1) 시라사야(白? / しらさや) : 지팡이 형태의 칼. 일반적으로 날 길이 70cm, 손잡이 길이 20cm 전후의 형태이다. 메이지유신 이후, 페도령이 내려지면서 사무라이들이 단속을 피하기 위해 사용했다. 애초에는 칼날을 보관할 목적으로 칼날만 따로 떼서 보관하는 역할의 ‘칼집’이었기 때문에, 칠하지 않은 칼집이라는 뜻에서 시라사야라는 이름이 붙었다.
0-2) 도첨(刀尖) : 날 끝. 환두대도의 칼코, 일본도의 킷사키(切先), 서양검의 포인트(Point)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무협지에서 주로 쓰는 검극(劍極), 도극(刀極)이라는 말은 사실 없으며, 창 극(戟)자를 쓰는 검극(劍戟)과 도극(刀戟)은 날이 달린 무기를 총칭하는 말이다.
0-3) 브릿지(bridge) : 몸을 뒤로 크게 젖히고, 머리 위로 들어 올린 팔로 땅을 짚어서 몸을 지탱하는 기술을 의미한다.
0-4) 경추(頸椎) : 7개의 등골뼈로 된 척추의 맨 윗부분. 목뼈.
0-5) 001은 한국에서 제공하는 국제전화 서비스, 81은 일본의 국가번호이다.
0-6) 주살(呪殺) : 주술과 저주 따위로 사람을 죽이거나, 사람이 죽기를 비는 일.
0-7) 잡기(雜技) : 잡다한 놀이의 기술이나 재주. 그 의미가 확장되어 굳이 놀이라는 범주에 국한되지 않고, 어떠한 분야에서든 그 분야의 주류에서 벗어난 부수적 기술들을 의미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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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 0 긴눙가가프(Ginnungagap)2-1)에서 나타난 것은 소녀와 사내, 그리고 변태

1

“다녀왔습니다!”
현관문을 젖히고 들어온 소년은 기세 좋게 외쳤다.
대답해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소년은 전혀 개의치 않는 태도였다.
사실 소년의 외침에 대해 대꾸가 돌아오는 것은 1년 중에 1/4이나 될까 말까 했다.
고고학자인 어머니는 1년 중에 10개월 가까이를 북유럽의 유적터에서 보냈다. 전통무예도장을 운영하는 아버지는 1년 중 반 정도는 수련이나 대련을 이유로 집에 붙어있지 않았고, 나머지는 항상 어머니와 함께 보냈다.
결국 가족이 모두 모이는 것은 고작 해야 1년 중에 2-3개월 남짓이어서, 소년은 대답 없는 인사가 어색하지 않았다.
“뭐, 슬슬 올 때도 된 거 같은데.”
소년은 한손에는 200㎖짜리 딸기우유팩을 들고, 입에는 빨대를 문 채로 웅얼거리며 집안으로 들어섰다.
소년의 체구는 꽤 컸다. 뭔가 운동이라도 하고 있는지 키도 골격도 보통 성인이상으로 커서, 블레이저 교복이 수트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렇다고 해서 어른처럼 보인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햇볕에 그을린 얼굴에는 아직 앳된 기가 그대로 남아있어서, 민증 없이 담배를 살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한쪽어깨에 걸쳐 메고 있던 백팩을 벗은 소년은, 백팩에서 체육복을 꺼내 열려져있는 다용도실 문 너머로 휙 던져 넣었다.
털썩-
보지도 않고 던졌는데도 단번에 골인이었다.
하지만 소년은 그다지 즐거워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당연히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한 마냥,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 듯한 태도였다.
소년은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응? 그새 왔다갔나?”
냉장고 안은 텅텅 비어있었다.
정확히는 계란 2개와 1000㎖짜리 흰 우유 한 팩 외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재료라든가 밑반찬이 이것저것 들어있었으니, 도둑이 와서 훔쳐 먹은 게 아니라면 그의 부모님 중에 어느 쪽인가가 톡톡 털어먹은 것이 분명했다.
“도장 갔나? …간만에 왔으면 집에도 좀 붙어있을 것이지.”
우유팩을 꺼내던 소년은 테이블 위에 놓인 노트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체육복 꺼낼 때를 제외하고는 책가방을 열지 않는 소년이 꺼내놓았을 리는 없는 노트였다. 하지만 그의 부모들 역시 아들네미를 위해서 메모 따위를 남길 만큼 세심한 인물들이 아니었다.
소년은 이마에 하고 있던 헤어밴드를 위로 주욱 잡아당겨 벗어버렸다.
기다란 적갈색의 머리카락들이 순식간에 눈앞을 뒤덮었다.
오랫동안 헤어밴드를 하고 있었던 탓에 머리카락이 눌려서 꽤나 우스운 꼴이었다. 하지만 머리카락이 가늘어서인지, 손으로 몇 번 툭툭 털자 금세 눌린 자국이 없어졌다.
“…뭐지?”
비어있는 한손으로 노트를 집어든 소년은, 우유팩 주둥이에 입을 가져다댔다. 어차피 우유가 몇 모금 남지도 않았으니, 한번에 다 마셔버리면 그만이었다.
시선은 노트에 고정시킨 채, 우유를 마시기 위해 소년이 고개를 젖힌 순간이었다.
“푸흡-!”
눈초리가 살짝 처져서인지 유난히 느긋하고 온순해보이던 소년의 눈이, 어울리지 않게 부릅떠졌다.
“풋, 켁! 케헥, 콜록 콜록!”
마시던 우유를 분수처럼 뿜어낸 소년은 온갖 의성어를 내뱉으며 몸을 뒤틀었다.
콧속에서 우유가 흘러나오는 느낌은, 경험하기 어려울뿐더러 지나치게 불유쾌한 나머지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종류의 것이었다.
소년은 티슈 한 장을 뽑아 코를 풀었다.
패앵-!
경쾌한 소리와 함께 콧속의 이물감이 사라지고 나서야 조금 기분이 나아진 소년의 눈에, 이 불유쾌한 상황의 원인이 된 ―심지어 그가 분수처럼 뿜어낸 우유로 앞장이 흠뻑 젖어있는― 노트가 눈에 들어왔다.
“……?”
우울한 얼굴을 한 소년은 코를 푼 휴지로 노트에 묻은 우유를 꾹꾹 눌러 닦았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유성펜으로 쓰인 글씨들은 테두리가 남색으로 약간 번졌을 뿐, 읽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To. 시우

현명하고 자애로우며 위대하신 부모님은 여행을 떠난다.
이제 도장도 집도 없으니, 앞으로는 알아서 잘 살아라.
너도 슬슬 제 앞가림은 할 수 있는 나이라고 이 아버지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물론 독립이라는 것은 스스로 하는 것이지만, 이 못난 아비의 마음이 못내 불편하여 아는 동생에게 앞으로의 네 거취를 맡기기로 했다. 모르긴 몰라도 밥 정도는 먹여줄 거다.
내일 오후쯤 되면 연락이 올 테니, 학교는 가라. 4교시까지라고 학교 안 가고 뻐기다가 걸리면 나중에 뒈진다.
그리고 키는 택배로 보내기로 했으니까 늦어도 일요일 아침까지는 집 비워둬라.

P.S. 약속 어기지 말고. 네가 챙겨도 되는 물건 목록은 뒷장에 대강 써 놨다.

From. 멋지고 근엄하고 현명하신 부친

“…거지같네, 진짜. 이 양반이 진짜 제대로 미쳤나….”
소년, 시우는 더 이상 입 안에 뿜어낼 것이 없어서인지 조금 진정이 된 상태로 중얼거렸다.
시우가 축축하게 늘어진 노트 한 장을 넘겼다.
그러자 우유로 인해 반쯤 번져있는 한 줄의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의복 교과서 학용품 만화책 조리기구 일체

“……”
짜증스럽게 인상을 구긴 시우는 노트 몇 장을 연달아 넘겼기다가, 이내 노트를 바닥에 내던져버리고는 분통을 터뜨렸다.
“장난하나! 딸랑 요거 쓰면서 뒷장은 왜 넘어가?!!!!!!”

2

검은 단발머리가 나른한 햇살을 받아 반짝거렸다.
소녀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살포시 눈웃음을 쳤다. 언뜻 경망스러워 보일 수도 있는 표정이었지만, 나긋하고 여유로운 그녀의 분위기 덕분인지 그다지 이상하게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시우 넌, 지금 너는 집도 절도 부모도 없는 상태라는 뜻이니?”
“틀린 말은 아닌데, 좀 노골적이지 않냐?”
부모에게 버림받은 소년, 시우는 소녀의 말에 우울하게 대답하며 책상 위에 철퍼덕 엎어졌다.
그의 옆에 서서 대화를 나누던 소녀는 시우의 옆자리 책상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피식 웃으면서 그의 뺨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후훗, 어차피 언젠가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잖아?”
“그래도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봐줄 줄 알았지!”
“……?”
소녀는 조금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시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시우의 어깨를 양 손으로 짚으며, 동정과 연민이 한가득 담긴 눈으로 그를 바라봐주었다.
“시우야.”
“…엉?”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드는 시우를 보며, 소녀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너도 이제 어린애가 아니잖니. 이제 슬슬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생각해.”
“지랄!”
소녀의 진지한 발언에 시우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고금을 막론하고 진실이란 대개 뼈아픈 법이라는 점이 한몫했다.
“여하간 헛소리 말고. 뭐… 그거보다 혜연아…”
“응? 왜 그러니?”
시우는 풀이 죽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며 혜연을 올려다보았다.
시우가 무슨 말을 꺼낼지 짐작한 혜연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헤연의 집은 서울 외곽의 야산을 끼고 있는 한옥이었다. 교통편이라든가 하는 문제 때문에 통학이 좀 불편하긴 했지만, 방만은 여유 있게 남아돌았다.
“나… 배고파.”
“……”
혜연이 짐작했던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어제 그러고 나서 확인해봤는데, 밥통도 비어있고 쌀도 몽창 들고 날랐더라고.”
“…그래서?”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먹은 거라곤 우유 쬐끔하고 계란후라이 2개밖에 없다고.”
시우의 투덜거림은 은근한 절박함이 깃들어 있었지만, 정작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혜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자애들은 다이어트 할 때 원래 그 정도밖에 안 먹어.”
“내가 지금 이 몸으로 여자애들 다이어트하는 거만큼 먹으면서 살 수 있겠냐? 그리고 넌 평생 다이어트 같은 거 해본 적도 없잖아?”
“쿡쿡…, 너 정말 모자라구나? 급하게 다이어트 안 하려면 평소에 식이조절을 얼마나 해야 되는지 모르니?”
손으로 입을 살짝 가린 채 웃음을 흘리며 반문하는 혜연의 모습에 시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식이조절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여학생들이라면 모를까 혜연에게 듣기는 조금 뭐한 내용이었다.
사실 혜연의 식이조절은 대외적 이미지 홍보용으로, 실제 그녀는 웬만한 남자들보다도 월등한 위장크기를 자랑한다는 사실을 시우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였다.
“아니, 뭐. 너도 그렇겠지만 나도 워낙에 운동을 해쌌느라 식이조절 같은 거 안 해봤거든.”
혜연의 눈꼬리가 샐쭉하게 치켜 올라가며 입으로만 웃음을 흘렸다.
“후훗. …안 닥쳐?”
“죄송함다.”입을 살짝 가리고 있던 손을 내리며 생긋이 웃어보인 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책상 옆에 매달린 자신의 가방에서 작은 쿠키봉지를 꺼내들었다.
시우의 옆자리로 돌아온 혜연은 쿠키봉지를 시우의 코앞에 내밀었다.
“먹어.”
“…직접 만든 거?”
“혜연님의 하해와 같이 드넓고 청천과 같이 드높은 은혜를 칭송하렴.”
쿠키봉지를 받아든 시우는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입으로는 히죽이 웃었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있다는 듯한 애매한 미소였다.
혜연이 내민 것은 초코쿠키, 정확히는 코코아쿠키였다.
코코아가루가 꽤 많이 들어가서 색을 보고는 잘 구워졌는지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냄새만은 그럴듯했다.
우득- 으득- 우드득―― 빠각- 빠가각――
분명히 시우의 입속으로 들어간 것은 쿠키였는데, 들려오는 소리는 돌 씹는 소리였다.
헌터의 눈으로 쿠키를 노리던 반 아이들이 슬그머니 자기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자신들의 치아 상태를 충분히 고려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시우는 태연하게 쿠키 하나를 입 안에 더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혜연에게 의미심장한 시선을 던졌다.
“이혜연.”
“응? 왜? 맛있니?”
“…내가 싫으면 싫다고 말을 해.”
빡-!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시우의 고개가 숙여졌다. 물론 자의에 의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닥쳐.”
“…웬만하면 때리기 전에 말해주지.”
소리는 컸지만 생각보다 아프지 않았는지, 시우는 태연하게 고개를 들었다. 맞았다는 것 자체에는 별 사감이 없는 듯한 태도였다.
“너 나이 먹어서 돈 좀 벌면 가정부라도 하나 써라. 니 남편 될 사람을 생각해야지, 아우슈비츠도 아니고 밥 대신 생화학무기를 먹으면서 어디 살겠냐?”
“어머…, 그러니?”
혜연은 그의 입속에 실내화를 처박아 넣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그의 손에서 쿠키봉지를 낚아챘다.
시우는 조금 놀란 표정을 했다가 이내 히죽히죽 웃어보였다.
혜연은 그를 향해 아무것도 쥐지 않은 한쪽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아무도 보지 않는 사이에, 희고 가느다란 가운데 손가락 하나를 슬쩍 펴보였다가 금세 손을 내렸다.
“그렇게 잘났으면 집에 가서 조미료라도 씹어 삼켜보지 그러니?”
“나의 고귀한 주둥이에 그런 거지같은 게 맞겠냐?”
혜연은 입으로만 웃고 있을 뿐, 눈으로는 시우를 표독스럽게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시우는 혜연이 화를 내도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녀가 TPO2-2)에 얼마나 충실한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과 후라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 1급 경계령을 때리고 튀어야겠지만, 일단 지금은 안전했다.
“흥!”
혜연으로서는 후회가 물결치는 순간이었다.
말이야 바른 말로, 일반적인 기준으로 봐도 혜연보다 요리를 못하는 사람은 정말 드물었으니 별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특히 시우는 가사능력 제로인 부모님과 살면서 초등학교 5학년 때 이미 집안 살림을 도맡고 있는, 말하자면 프로주부였다.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이미 4종의 조리기능사와 제과, 제빵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했고, 지금은 복어조리기능사까지 총 7개의 요리관련 자격증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장래희망은 총평수 150평에 80석, 직원 수 25명 이상 규모인 레스토랑의 오너쉐프(owner-chef)2-3)였다.
우득- 우드득― 빠각-
“…대박인데? 반죽을 대체 뭘로 하면 이렇게 되냐? 이거 크게 만들어서 사람 패면 대가리도 박살내겠네.”
“……?”
엄청난 소리를 내며 쿠키를 씹고, 아니. 박살내고 있는 시우의 모습에, 혜연은 결단을 내렸다.
대화를 나눔에 있어서 화제의 순환이란 빠를수록 좋은 법이었다. 그리고 혜연은 무척이나 센스 넘치는 커뮤니케이터였다.
“그래서 집은 언제까지 비워야하는 거니?”
“몰라. 일요일 전까지는 빼라고 했으니까 3일 정도는 괜찮겠지.”
“…정말?! 그럼 당장 먹고 자는 건 어떻게 하려고?”
혜연의 눈이 동그랗게 치켜떠졌다. 설마하니 그렇게 급하게 나가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탓이었다.
시우의 생활력은 바퀴벌레 이상이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보호자 없이는 장기 숙소도 구할 수 없는 미성년자에 불과했다.
혜연은 이 기회에 시우를 자기네 집으로 불러들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실 아무리 오랜 친구라고는 해도, 고등학교 남학생이 여자 동급생의 집에 신세를 진다는 것은 꽤나 이상한 일인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 집에는 혜연보다 11살이 많은 언니 가족도 함께 살고 있었다. 혜연의 형부는 시우 아버지의 몇 안 되는 제자 중 한명인데다 시우의 사형이기도 해서, 오히려 웬만한 집보다 도덕적인 면에서는 더욱 문제가 없었다.
게다가 시우는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종종 혜연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한터라, 그다지 이상할 것도 없었다.
요즘도 심심하면 들러서 노닥거리거나 반찬을 해주고 가는 만큼, 가족까지는 아니라도 근처에 사는 친척 정도는 되는 관계였다.
이 모든 것이 방임주의를 넘어서서 방치주의를 표방하는 시우네 집 분위기 덕분이었다.
“몰러. 정 급하게 되면 너네 집에 좀 빌붙어도 될 거고. …어떻게든 되겠지.”
혜연은 살포시 웃었다.
그의 말마따나 어떻게든 되면 좋은 거고, 만약에 어떻게도 안 됐을 때는 자신의 집으로 끌고 들어가면 그만이었다.
“데리러 오기로 했다는 사람에 대해서는 짚이는 게 없니?”
“…별로 없는데.”
“너무 예상했던 대로의 대답이라 맥이 빠지네.”
입으로는 실망했다고 말하면서도 혜연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그 이유를 그녀도 알고 있는 탓이었다.
“뭐, 어찌됐든 간에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고…”
시우는 어렸을 때의 기억이 거의 없었다.
정확히는 7살 무렵을 기준으로 그 이전의 기억을 전혀 떠올리지 못했다.
게다가 시우의 부모님은 옛 이야기를 잘 해주는 편이 아니었다. 사이좋게 앉아서 담소를 나누는 타입의 가족도 아닌데다, 시우도 그 부모님도 진지한 이야기에는 소질이 없는 타입이어서였다.
덕분에 시우는 자신의 어린 시절이나 부모님의 옛날이야기, 혹은 부모님의 교우관계 따위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게 없었다.
혜연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기대하지 않은 것이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중얼거리듯 말한 시우는, 혜연의 손에 들린 쿠키 봉지에 억지로 손을 쑤셔 넣어 쿠키 몇 개를 잽싸게 꺼냈다. 그리고 그 중에 하나를 꺼내서 입속에 밀어 넣었다.
와득- 와드득―
“새로 이사 오는 사람한테 나 찾는 사람 있으면 말 좀 전해달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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