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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 3급 매니저, 치유담당 초파랑
  • 2급 매니저, 여동생담당 우연하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너에게는 기억이 있나요
글쓴이: 일락
작성일: 11-10-15 23:57 조회: 4,946 추천: 0 비추천: 0

“어째서 너네 주인님은 이렇게도 양보의 미덕이 없는 거니?”
뒤에서 들려오는 누나의 애처로운 연기가 심상치 않았다. 애써 무시하려고 해도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절대 돌

아보면 안 된다. 내 등 뒤에서 어떤 광경이 펼쳐지든, 심지어 누나가 내 침대 밑에 손을 집어 넣거나 책꽂이 뒤

의 비밀 공간에 있는 보물.zip에 손을 대는 한이 있더라도. 월화수목금, 힘들었던 일주일을 겪고 이제 겨우 컴퓨

터 앞에 앉았는데 이 소중한 기회를 놓칠 수야 없었다. 일주일의 스트레스를 게임으로 날리는 정도의 권리는 있

어야지. 흔한 반도의 고등학생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누려야 하는 권리인데.
“응? 말해봐. 너는 알고 있잖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주인님을 모시잖아? 왜 말이 없니? 너의 주인님을 위해서

, 입을 다물기로 한 거니?”
누나의 연기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불타올랐다. 어느새 애처롭게 우는 장면에서 상대방을 무섭게 추궁하는 장면

으로 넘어가 있었다. 이미 누나는 그 독백 같은 연기를 즐기고 있는 듯 했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하고 있는 게

임을 관둘 일은 없다. 한창 내가 조종하고 있는 여자 캐릭터가 하얀 색 원피스 자락을 휘날리며 커다란 해머로

상대방을 압도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대업적을 세울 수 있었고, 그 다음에는 저 시덥잖은 연기나 하고

있는 누나의 머리통을 박살내버릴 수 있겠지.
“네가 매일 주인님의 잠자리 시중을 드는 위대한 존재라는 건 알고 있지. 너의 긍지는 알고 있어. 나도 예전엔

너의 일을 뺏고 싶긴 했으니까. 하지만 이젠 아니야. 어서, 어서 말해. 너의 반항은 이제 통하지 않아.”
그러고 싶었던 거냐? 진짜로? 그러고 싶었던 거 맞지?
등에 닿은 티셔츠에 식은땀이 배어드는 감각이 느껴졌다. 모니터 열을 너무 받아서인지, 누나의 말에 난방 기능

이 있어서인지 이마가 점점 화끈거려왔다. 아니지, 그래도 저 말에 넘어가면 안 된다. 내 육감이 말해주고 있었

다. 저 말 또한 그녀의 수작에 불과하다고, 뒤를 돌아보는 순간 모든 게 끝이라고.
“쳇, 결국 말하지 않을 모양이구나. 좋아, 그럼 이제 너의 그 볼품없는 옷을 한 꺼풀씩 벗겨주지. 후후후. 기

대하라고.”
“제발 그만 둬.”
하지만, 넘어갈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고야 말았다.
누나는 1인용 솜베개를 양손으로 붙잡고 앉은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멋대로 내 침대 위에 올라와 앉아서

는 그 더러운 엉덩이를 내 이불에 부비적거리고 있었다. 나중에 방향제라도 뿌려두지 않으면 밤에 잠이 안 올 것

같다.
노란 역십자가 형태의 문양이 곳곳에 그려진 하얀 제의, 금빛이 나는 악세서리들로 장식된 하얀 사제모자, 마치

온라인 게임 속에서 툭하고 튀어나온 성직자 같았다. 딴지 걸고 싶은 부분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21세기 한

국에 판타지 세계에서나 볼법한 여사제가 있는 거나, 저리도 당당하게 내 방에서 뒹굴뒹굴 거리고 있는 거나. 기

타 등등.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저건 내 친누나다.
인정하긴 싫지만 내 친누나다.
“…봐, 부하를 생각하는 착한 주인님.”
“시끄러.”
누나는 귀여운 척하며 웃기만 했다. 덕분에 내 진심이 담긴 말은 무참히 흩어졌다.
누나의 주변에는 딱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 부하, 혹은 하인 정도로 추측되던 누나의 대화대상

은 내 베개였던 것 같다. 언젠가 실제로 자기가 베개와 말하는 능력을 가졌다고 농담 삼아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게 지금 일을 위한 단순한 복선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무 반응도 없는 베개에 대고 심문이나 하고 있는 자

폐증 소녀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는게 문제였지만. 사이코메트리는 무슨, 그런 만화 같은 전개가 있을 리가 없지.
나는 그 베개 만담소녀를 향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대체 왜 내 방에 와서, 나한테, 내 컴퓨터를 쓰겠다고 하는 거야?”
“헤헤헤.”
이 컴퓨터는 내 소유라는 점을 애써 강조해봤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누나가 두 번째로 귀여운 척했다. 나는

두 번째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주말에 하루 종일 앉아서 컴퓨터만 하면 몸 상해.”
“그런 말 하는 사람이 컴퓨터 쓰겠다고 동생 방을 찾아?”
“동생을 위한 희생이잖니.”
동생을 위한 희생을 하는 가련한 누나의 표정연기에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나는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
“엿처먹어. 그리고 시작한지 30분 밖에 안 되었거든?”
“컴퓨터 중독자들은 늘 그런 말 한대.”
“망할.”
나는 4시간째 켜놓은 게임을 종료했다.
이틀 전부터 이랬다. 내가 게임을 할 때마다 어떻게 알았는지 내 방에 들어와 앉아서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거

나, 지금처럼 베개에 대고 1인 2역 연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나는 누나에게 컴퓨터를 빌려주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누나 방에도 컴퓨터 있잖아.”
“그게, 컴퓨터가 고장났나봐.”
“아, 그래서 그건 내 책임이고?”
“아니- 그냥 그렇다구.”
“콘센트는 꼽았지?”
“그럼 내가 그것도 모르겠니?”
누나는 자기를 무시하냐면서 씩씩거렸다. 하긴 콘센트가 뽑힌걸 고장 난 것으로 착각하는 여자애가 요즘 세상에

어디 있겠냐만은.
“그 정도는 나도 안단 말이야. 하여튼! 가야 언니한테 물어보니까 바이러스 어쩌고 하길래 수리해달라고 부탁했

어. 근데 컴퓨터도 백신이란 걸 맞는다더라? 신기하지?”
“전혀.”
“독감에는 생강차가 딱인데. 생강차 부으려고 하니까 가야 언니가 막 화냈어.”
“그거야 화낼 만 하네.”
“왜?”
“안철수 교수님과 파스퇴르 교수님이 아시면 통곡을 하시니까.”
그리고 일부러 천진난만한 척하지 말라고, 그런 저질개그로는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고 못박아두었다. 누나는

참 유감이라 생각했는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볼일 끝났으면 빨리 나가셔 훠이.”
물론 나는 누나의 입술이 도톰해지든, 오리 주둥이가 되든 전혀 상관 없었다. 누나에게 나가라고 손짓하고, 다

시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모처럼 대업적도 세운 김에, 기세를 몰아서 다음 부분까지 진행하려고 하는데, 데쟈

뷰가 느껴졌다.
“어째서 너네 주인님은 이렇게도 양보의 미덕이 없는 거니?”
그 데자뷰는 마우스를 집어 던지고 싶을 정도로 강한 충격이었다. 내가 관심을 끊어버리자 또 다시 청승맞은 (

척하는) 발연기를 시작한 것이었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누나가 베개를 붙잡고 다시 일장연설을 늘어놓는 괴상한

광경이 상상되었다.
“진짜 너무하지 않니? 누나는 지금 컴퓨터를 못쓰는데, 마침 중요한 용건이 생각나서 꼭 컴퓨터를 써야하는데,

집에 멀쩡한 컴퓨터가 여기 밖에 없는데”
“….”
“그래도 동생이 싫다하면 어쩔 수 없는 걸까? 아아, 어떻게 해야 되지….”
“가야 누나한테라도 가시죠.”
“휴우, 어째서 너네 주인님은…”
“써! 쓰라고! 제발 써주세요. 부탁입니다.”
결국에는 내 스스로 일어나서 또다시 베개를 붙잡고 한탄을 늘어놓으려는 누나를 잡아다가 억지로 컴퓨터 앞에

앉혀놨다. 누나는 자기 뜻대로 움직이니까 기분이 좋았던지 헤헤 웃었다. 티없이 순수해 보이는 웃음 속에 있는

가증스러운 모습이 두려울 정도였다.
“고마워~”
“이상한 거 하지 마. 어?”
“걱정 마.”
누나의 말에 도저히 신뢰가 가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절대 내가 말에서 밀리거나, 침대 아래쪽의 보

물.zip을 압축해제 당하는 것이 두렵거나, 누나의 베개 토크쇼에 고문을 당해서가 아니다. 누나의 치졸하고 더러

운 수법에 당한 것일 뿐이다.
누나가 신나서 컴퓨터를 만지작거리는 광경을 보다가 화가 치밀어 올라서, 나는 피시방에 갈 준비를 했다. 슬슬

추워지니까, 점퍼 하나만 걸쳤다. 나에게서 컴퓨터는 빼앗을 수 있을지는 모르나, 권리를 뺏을 수는 없을 것이다

.
“어디 가니?”
“피시방.”
“혹시 나가면 오는 길에 김밥도 좀 사와줘. 저녁에 먹게~”
“네가 사와!”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분통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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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너네 누나한테 뺏긴거니?”
피시방 한구석에 자리잡고 앉아있던 나를 발견한 시노가 내 변명을 들은 후 내뱉은 첫 말은 이랬다. 과연 내가

알고 지내는 유일한 동갑내기 여자애다운 말이었다. 그 톡 쏘는 느낌을 한껏 만끽하고, 나는 2초 후 밀려오는 깊

은 분노를 잠재우며 그녀에게 변명했다.
“양보한 거지. 오해하지마. 내 너그러운 마음으로, ‘양보’해준 거니까.”
양보라는 단어에 힘을 줘서 발음할 때부터 시노는 코웃음을 쳤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우스갯소리로 알아들은 것

같다. 들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거나.
“그래. 너그러운 마음이라 순순히 ‘뺏기고’ 여기로 왔겠지.”
“시끄럽다.”
빨간 후드티에 블랙 진을 입고 있는 까무잡잡한 피부의 여자애, 시노는 피식 웃으면서 내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

았다. 기세가 맹렬해서 피시방 의자가 부서질 듯 불안하게 끼익 소리를 내었다.
“운동했었냐?”
“하려고 했었지.”
“안됐지만 나랑 좀 놀다 가.”
“피시방만 아니면.”
“말은 그렇게 해도 몸은 솔직한 주제에.”
나는 익숙하게 컴퓨터를 키고 키보드를 세팅하고 회원 로그인을 하는 시노를 보며 속으로 웃었다. 시노는 운동만

큼이나 게임을 좋아하는, 보통의 여자애보다 남자애 같은 취미를 갖고 있는 여자애다.
“여자애한테 못하는 말이 없네. 이거 왜 이래? 나도 감수성 있는 아녀자야.”
“게임으로도 감수성은 키울 수 있어.”
“피시방 말고 다른 커맨드는 없니?”
“내가 널 부를만한 이유가 그것 빼고 달리 있겠냐.”
“너무하네.”
시노는 말로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막상 피시방에서 노는 걸 굳이 싫어하지는 않는다. 시노와 어렸을 적부터

간간히 같이 게임을 했던 친구로서 장담할 수 있다. 정말 그녀는, 남자애 같은 여자애니까.
“어쨌건, 너만 집밖에 나와서 억울하니까 덩달아 나까지 불렀다 이거지?”
“그렇지.”
“썩을 놈이네.”
“그건 아니지.”
“뭐 알았어. 어차피 집 컴퓨터도 느리고. 새삼스런 것도 아니고.”
새삼스런 것도 아니고, 묘하게 뒤끝있는 말을 하며 시노는 게임을 실행시켰다. 그 말은 오히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그녀도 가끔 자기가 기분 나쁠 때, 집에서 쉬고 있는 나를 불러다 게임 상대를 해달라고 조르는 편이

었으니까. 그래서 주말이면 가끔 이렇게 만나 피시방에서 시간을 때우곤 했다.
그래도 갑작스럽게 부른 것에 조금 찔리는 구석이 있긴 했다. 싫어하는 눈치를 보이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시노가 너그럽게 내 호출에 응해줬으니 이 정도의 불평은 가만히 들어줘야지. 시노의 너그러움은 그야말

로 누나에게 컴퓨터를 ‘양보’해 준 내 너그러움과 비교해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시노는 마우스로 이것저것 눌러가며 게임 준비를 했다. 서비스로 받은 아이스커피를 빨대로 쪽쪽 빨며 나에게

말했다.
“맞다. 어제 캐쉬 좀 질렀어.”
“막장이네.”
“막장은 무슨. 자본주의지. 봐봐. 캐쉬 지른걸로 산 거야.”
그녀는 마우스를 움직여 이것저것 조작한 뒤에 나에게 화면을 보여주었다. 검붉은 톤의 전신 타이즈 코스츔이었

다. 전대물에서나 볼 법한 그 괴상한 디자인의 옷은 아바타의 몸에 딱 달라붙는 형태였는데, 섹시한 몸매가 그대

로 드러났다.
“너는 절대 못 입을 옷이네.”
“아니거든? 근데 멋지지? 빨간 게 완전 내 스타일이야.”
“예쁘네. 예뻐서 때리질 못하겠다.”
“이 옷 사놨다가 앞으로 너 만날 때마다 입고 와서 패버려야겠네.”
“뭐라는겨.”
시노의 미소가 왠지 무서웠다. 설마 진짜로 저걸 입어다가 날 때리려는 건 아니겠지. 옷이야 입으면 자기만 부

끄러울 테니 논외더라도, 시노에게 맞는 건 무섭다. 시노가 스파이크 날리듯 등짝이라도 때리면 상당히 아프다.
“내가 못 입는다고 하니까 그렇지.”
“너 야한 옷 못 입잖아.”
시노는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사실이니까. 항상 자기 몸매에 콤플렉스를 갖고 있어서 몸매를 드러내는 걸 죽도

록 싫어한다. 근육이 징그럽다나 뭐라나. 내가 볼 때는 딱히 징그럽지도 않고, 오히려 건강해 보여서 좋은데.
“…너 같으면 남들한테 내 복근이랑 견갑근 보이고 싶겠니.”
“배랑 어깨라고 해라.”
“입기 싫은 건 사실이지만.”
“그런 건 빨리 좀 말하라고.”
시노는 괜히 이쪽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좋아. 스타일도 마음에 들고, 거기에 세배 빨라지는 것 같은 효과까지 있어.”
“없겠지.”
“흥, 믿고 싶진 않겠지. 하지만 실제로 내 DPS(damage per second, 초당 데미지)는 3배 많아졌지!”
“DPS가 아니라 Def(방어력)겠지.”
요즘 캐릭터는 무기 대신에 옷을 들고 싸우나?
“그리고 그 캐릭터, 방어력으로 단점이 커버될 리가 없어.”
“명언을 모르는구나, 실력이 없으면 아이템빨.”
“그런 건 스스로 인정하지마.”
덕분에 돌려서 말하려던 게 무산이 되어버렸다. 실력이 있어야 단점이 커버된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어어? 인정하다니? 인정해야 할 건 너지. 실력이 좋거나 아이템이라도 좋아야 하는데, 너는 둘다 없잖아.”
“건방지네? 실력의 차이를 느끼게 해줘?”
어쨌거나 우리는 재미있게 게임을 했다. 내 기준에서였을지도 모른다. 왜냐면 시노는 나에게 연전연패했고, 10

연패를 넘어서부터는 나도 승수를 세는 걸 잊어버렸으니까.
“때려치우고 운동이나 더 해야겠다.”
시노가 결국 분통을 참지 못하고 다시 가버리려고 할 때까지 내 연승행진은 계속 되었다. 실력이 없으면 아이템

이라도 좋아야 한다는 격언은 결국 틀렸다는 것이 입증된 셈이다.
“화났어?”
“안 화났거든?”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시노의 눈은 이미 촉촉했다. 시노로서는 오늘 운동은 다 했을지도.
“다음부터는 다른 게임을 하자.”
“시끄러워. 3일, 아니 일주일만 기다려. 어? 너의 그 더러운 블랙헤드가 잔뜩 낀 콧대를 완전히 뭉게서 스크럼

으로 피부관리 받은 것처럼 만들어주겠어…!”
되도 않은 비유를 섞어가며 길게 말하는 걸로 봐서는 어지간히도 열이 뻗혔나보다. 나는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

들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게임 내용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치, 그럼 오늘은 그만 하자. 나도 슬슬 집에나 가봐야겠다.”
“더 안해?”
“별로. 집에서 혼자 TV나 보면서 뒹굴거려야지. 아, 김밥도 사가야 돼.”
나는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여자애의, 능글맞고 재수없는 얼굴을 떠올렸다.
“김밥? 아, ‘노엔’이 심부름 시킨 거 말야?”
“노엔?”
“너 잊어먹었어?”
시노가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담배 냄새를 너무 맡아서 뇌라도 타버린 걸까, 혹시나 싶어서 내

기억을 뒤져봤지만 역시 모르겠다. 나는 시노에게 물어봤다.
“내가 왜 ‘노엔’한테 김밥을 사줘야 되는데?”
“어어? 이젠 심부름도 까먹냐. 아니, 김밥은 산다며?”
“그거야 나 먹으려고 사는 건데. 저녁 대용으로.”
시노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손바닥으로 이마를 쳤다. 그녀로서는 꽤 흔하지 않은 리액션이었기 때문에, 괜히

걱정이 되었다. 내가 뭔가 잘못 알고 있었나?
“지금 ‘노엔’이 너네 집에 있다며. 네가 컴퓨터 양보해줬다며. 저녁은 김밥 사 먹자고 해서 피시방 갔다 오

는 길에 사오라 했다며.”
“그랬던가? 근데 ‘노엔’이 누구야?”
“니 친구 이름도 잊어먹냐.”
“내 친구? 누가? ‘노엔’이?”
“그럼 니 여자친구겠냐.”
하긴 나에게 여자친구가 있을리 없지. 아니, 이게 아니고, 뭔가 이상했다. 지금 내가 무언가를 잊어버리고 있는

건지, 왠지 모르게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머리가 눅눅하게 아파왔다. 감기에 걸렸을 때처럼 누가 내 뇌

를 짓누르고 있는 것 같은 두통이 밀려들었다. 왜 우리 집에 ‘노엔’이 놀러온 거지? 그리고 내가 ‘노엔’을

집에 놔두고 피시방에 와서 시노랑 같이 게임을 했다고? 머리 속에서 온갖 것이 뒤죽박죽 섞였다.
“아 머리아파. 내가 지금 무슨 말 하는 건지 모르겠다.”
“정리할게. 넌 지금 당장 심부름으로 김밥을 사들고 가야 돼.”
“그런 건가. 뭐 맞겠지. 담배 냄새를 너무 맡았나.”
결국에 나는 깊게 생각하는 걸 포기했다. 시노의 말이 맞는 것 같다. 아니, 생각해보니 어렴풋이 기억이 있다.

분명 가는 길에 김밥 사오라는 말을 누군가에게 들은 것 같긴 하다. ‘노엔’이 우리 집에 놀러왔다느니 뭐하느

니 해도 어쨌건 저녁을 김밥으로 때우려고 했었고, 어차피 분식집에는 가야한다. 머리가 복잡하니까 깊게 생각하

지 말자.
“게임 좀 줄여, 하여간 정신 못차리고.”
“네가 그 말 하니까 진짜 웃긴 거 알아?”
"난 운동을 하잖니. 넌 안하고."
"하지만 네가 앞으로 일주일동안 폐인같이 게임할거란 것도 알고 있지."
“와, 욕하고 싶어!”
시노가 이빨을 드러내며 화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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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분식점은 우리집 바로 맞은편에 있는 자그마한 건물에 있다. 3층짜리 건물로 3층에는 집주인이 살고 있고

1~2층을 세놓아 가게를 차리게 한 것이다. 그 중에 가야 분식점은 1층에 위치해 있다. 우리 집 및 가야 분식점과

내가 다니고 있는 고등학교는 매우 가까워서 가야 분식점으로서는 최상의 입지조건이었고, 당연히 우리 학교 학

생들도 많이 찾는 곳이다.
그리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당연히 가야 분식점을 자주 애용하는 단골손님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여, 선우왔네. 올만이네.”
가야 분식점의 주인이자 알바생인 가야 누나는 나를 보며 손을 까딱였다. 일요일 오후라서 사람이 없었던지 가

게 안의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앉아서 TV라도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검은색 앞치마를 걸친 등받이 의자에 기댄

채로 심심해 죽겠다는 무언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손님이냐.”
“김밥 두줄 싸줘요.”
“쳇.”
혀를 차면서, 가야 누나는 느릿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앞쪽의 가판대를 향해 발을 질질 끄는 것이 정말 귀찮

다고 온 몸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기 이름을 내건 가게를 운영하는데 주인 의식이 없어도 너무 없다. 그

런 생각을 하는데, 가야 누나가 갑자기 멈춰 서더니, 다시 무기력하게 의자로 돌아가 앉으며 말했다.
“아, 귀찮아. 세줄 줄 테니까 네가 알아서 썰어가.”
“허. 손님 취급도 안 해주고.”
나는 가야누나의 말대로 가판대에 있는 스티로폼 박스에서 김밥을 꺼내는 대신에, 가야 누나의 맞은편에 앉았다.

두줄 살 돈으로 세줄을 얻을 수 있다는 건 정말 좋은 일이지만, 이건 이거고 그건 그거였다.
“그럼 앉아서 뭐 먹고가. 손님취급 해줄게.”
"꼭 그래야 돼요? 집에 가져갈건데."
"안 그러면 김밥 하나에 3000원에 팔거야."
"완전 폭리!"
가격이 순식간에 두배로 껑충 뛰다니, 이렇게 바가지를 쓸 바에 차라리 손님 취급 안 받는게 낫겠다.
"어, 그럼 떡볶이 하나 주세요. 먹고 가게."
"진짜지?"
아까 힘없이 가판대로 향하던 발걸음과는 전혀 다른 기세로 가야 누나는 안쪽의 조리실로 달리듯 들어갔다. 둥

글게 말아올린 가야 누나의 머리가 풀려질 듯 심하게 흔들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좋아해줄 줄은 몰랐는

데. 내 지갑 사정을 고려했을 때, 빨리 멈추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 같다.
“너 거기 꼼짝말고 있어. 내가 곧 떡볶이를 몰고 가서….”
“뻥이에요. 돈 없어요.”
“야이 망할 놈아.”
“김밥 여기서 먹고 갈게요.”
“자꾸 주문 바꾸면 니 성별을 바꿔버린다?”
가야 누나는 한숨을 쉬면서 다시 가판대로 갔다. 김밥 써는 소리가 묘하게 날카로운 것이, 왠지 화를 꾹꾹 눌러

참는 모습이었다.
“아니 제가 뭐라고 말이나 했습니까?”
"뭐라고 말은 안했다만. 내가 열받으니까, 너 못나가. 나랑 놀아."
“아이고, 내가 뭘 어쨌다고. 왜 그렇게 붙잡으려 하세요.”
내 말에 가야 누나는 내 쪽을 보더니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기분이 이상해졌다.

가야 누나는 한숨을 푹 쉬면서 말했다.
“들어봐. 내가 아직 20대 초반이야. 그치?”
“그렇죠.”
‘초반 후반으로 나누면 25도 초반이겠죠.’라는 말을 굳이 하진 않았다. 김밥 썰던 식칼에 찔려 죽어 뉴스거리

가 되는 건 사양이었다.
“내 또래 애들은 한창 잘 나갈 때지 않아? 내 친구년도 아까 카톡으로 남친 만난다 뭐 한다 하면서 염장을 지

르더라? 고 여시 같은 년이?”
“싸가지 없네요.”
“그치? 근데 난 여기서 김밥이나 썰고 앉아 있다고. 얼마나 불행해? 아니, 남친 없는 거야 상관 없지만 지금 내

가 무지 심심하단 말이야. 저녁때까지만 있어줘.”
그렇게 말하며 가야 누나가 그릇을 가지고 왔다. 그릇에 김밥이 세줄 있는 걸 보니, 인질이 되어버린 내 몸값은

아무래도 1500원 정도인 것 같다. 이야기 상대가 필요하다는 말을 저렇게 길게 할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너무

심심한 나머지 묻지마 납치극의 범인 흉내를 냈나보다하고 넘어갔다. 공짜는 소중하니까.
"알았어요. 어휴."
그래도 차마 싫다고는 말 못하고, 기왕 잡힌 김에 이야기나 하기로 했다. 이미 몸값도 받았고, 가야 누나를 무

시하고 그냥 갔다가는 가야 누나 성격에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날게 뻔했다.
“그래서, 요즘 장사는 잘 되요?”
“시원찮지 뭐.”
그녀의 말버릇, 어쩌면 모든 장사꾼들의 말버릇이 아닐까 하는 말을 하며 그녀는 웃었다. 원래는 가야 누나의 어

머니가 운영하던 가게를 잠깐 도와주기로만 했었는데, 그 이후로 손님수가 급격하게 늘어나게 되어서, 지금은 부

업이 아니라 본업이라고 투덜댈 정도였다. 이제는 아주머님도 아예 가야 누나에게 가게를 떠맡겨 놓은 상태다.

덕분에 여느 집처럼 자식 이름을 따서 지었던 가게 이름이 주인 이름과 딱 떨어지게 되었다.
“그래도 컴공과 출신이 분식집 운영하는 게 어디야.”
처음에는 정말 싫었다고 가야 누나가 말했지만, 지금 이렇게 우스갯소리나 하고, XX고등학교 남학생들에게는 가

야 분식점의 여신이라고 추앙받고 있다면서 한껏 자만해 하는 걸 보면, 그 이야기가 진실인지 의심이 되긴 한다.
그녀는 내 앞자리에 앉자마자 인상을 찡그리며 코를 킁킁거렸다.
“너 담배 냄새난다? 요새 담배피냐?”
“필 것 같아요?”
“너 같은 오타쿠가 일진들 흉내낼 리가 없지. 피지 마, 담배는. 머리에 피 마른다.”
“말이 좀 이상한데, 그리고 저 오타쿠 아니거든요?”
“게임 폐인 주제에, 그리고 머리에 피 마르면 죽잖아.”
“그런 구닥다리 개그나 하니까 남자친구가 없지.”
나는 고개를 젖혀 가야 누나가 휘두르는 숟가락을 가까스로 피했다.
“피시방 갔네. 시노랑 같이?”
“그렇죠 뭐. 걔는 볼일 있다고 먼저 갔어요.”
“하여간 남자들은 참 특이해. 집 컴퓨터도 좋으면서 왜 피시방을 가는지.”
시노는 여자애인뎁쇼. 딴지를 걸고 싶었지만 참았다. 집 컴퓨터라는 말을 들으니 새삼 가야 누나에게 부탁할 일

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러고보니 우리 집 컴퓨터가 고장 났었지. 원인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분명 고장이 났다. 그래서 피시방에

서 게임을 한 거고, 혼자서 게임하기가 심심해서 시노를 불렀지.
“그 집 컴퓨터 말인데, 누나가 좀 봐주시면 안 되나요.”
“고장 냈어?”
“바이러스 같은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야 누나가 징그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얼굴의 땀구멍 하나하나에 불쾌함이 뚝뚝 묻어

나는 끔찍한 표정이었다. 혹시 가야 누나에게 내가 바퀴벌레로 오인받고 있는건 아닌가하고 진심으로 걱정이 되

었다.
“…너 내가 그러니까 야한거 그만 보라고 했지?”
“안 봤거든요?”
많이는.
“야한거 볼 거면 일본에서 정품 DVD사서 보라고. 괜히 암흑루트 돌다가 컴퓨터 훅 간다.”
“아니, 진짜. 제가 왜 누나한테 이런 말을 해야 되는 거에요?”
“요새 유행하는 바이러스도 없고 처음에 내가 손봐줄 때 보안 수준도 최신으로 해줬으니까 네가 관리만 잘하고

이상한 데만 안 들어 갔으면 바이러스 걸릴 일이 별로 없어.”
“윽.”
“뭐, 보나마나 피부 하얀 애들 찾아다니느라고 되지도 않는 영어 실력에 이상한 검색어만 알아서 구글링하다가

토렌트 다운로드니 뭐니 하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녔겠지?”
“…….”
“어차피 컴퓨터 상태 볼 때 확인하면 들통나는데 뭐 하러 속이니. 임마. 이 누님은 남동생이 그런 거 봐도 아

무-런 느낌도 없으니 걱정하지 말어.”
얼굴에 열이 뻗치는 건 둘째치고 가슴 속에서 오징어가 구워지는 것 같았다. 나도 노엔처럼 뜨거운 생강차를 부

어주고 싶었다. 물론 컴퓨터가 아니라 가야 누나의 머리에.
“하여간 알았어. 언제 한번 봐줄게. 대신에 친구들 여기 좀 많이 데려와.”
“시노랑 한번 올게요.”
“걔는 너랑 오면 적게 먹어서 싫어. 남자애들로 데리고 와.”
시노도 나름 먹보인뎁쇼. 다른 학교에 있는 씨름부라도 데려와야 가야 누나의 마음이 만족할 것 같다. 그렇다고

진짜로 데려올 마음은 없고, 아는 사람도 없고, 가야 누나도 그냥 해본 말일 테니, 가야 누나의 말은 대충 무시

하기로 했다.
“산삼보다 더 좋은 게 고삼인거 알지? 조공 제대로 해라.”
“그럼 내년에 데리고 올게요.”
“맞다, 너 아직 고2였지… 알았다 그래. 많이 먹어. 많이 먹고 쑥쑥 커라. 더 줄까?”
“애 취급 하지 마요.”
아직 애야, 가야 누나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다. 물론 그 깔보는 듯한 손길이 정말 싫었기 때문에 나는 노

골적으로 싫은 티를 냈다. 물론 그렇다고 쓰다듬기를 포기할 가야 누나가 아니어서, 결국에는 머리를 쓰다듬당했

다. 화를 내려는데, 갑자기 바지 앞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휴대폰을 꺼내 확인해보니 시노의 전화였다. 그

사이에 한번 더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가야 누나의 손을 뿌리치며, 나는 빨리 전화를 받았다. 가야 누나가 아쉬운

지 괜히 손을 쥐락 펴락했다.
“뭐야.”
“야, 너 지금 어디야?”
“어? 나?”
“빨리!”
시노는 전화를 받자마자 다급하게 외쳤다. 귀가 시끄러워져서 나는 핸드폰을 귀 멀찍이 떼어놓았다. 가야 누나

가 무슨 일이냐면서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까딱거렸다. 나는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시노가 갑자기 소리를 지

르는 이유는 오히려 내가 알고 싶었다. 멀쩡히 같이 게임하던 녀석이 갑자기 왜 이렇게 소란일까 궁금해하면서,

나는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가야 분식. 집에 갈 건데 왜.”
“너 집에 꼭 있어야 돼. 나 지금 글로 가니까. 어디 가지 말고 있어. 알았지?”
“왜? 왜? 야, 어이?”
시노는 할 말만 하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 나는 황당해져서, 핸드폰 액정만 바라보았다. 가야 누나가 슬쩍 물었

다.
“시노야?”
“네, 근데 갑자기 끊었는데.”
“뭐 급한 일이라도 있나봐?”
“방금 전까지 한창 잘 놀아놓고 무슨 급한 일이지?”
"놔두고 간거라도 있나보지 뭐."
가야 누나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시노의 이상한 행동에는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어쨌거나 이것은 좋은 기회였다. 가야 누나의 감옥에 갇힌 몸값

1500원짜리 인생에서 벗어날 절호의 기회였다. 나는 방금 전까지 했던 말을 머리 속에서 깡그리 지워버리고, 짐

짓 운을 뗐다.
"음, 그러고보니 시노가 매우 급한 볼일이 있는 것 같던데."
"지랄한다."
"와, 너무하시네!"
내 계획은 바로 커트당했다. 하여간 눈치가 너무 좋다.
"그딴 연기하지 말구, 볼일 있으면 어여 가봐. 칫, 오랜만에 재밌는 일이나 해보려고 했는데."
그리고 사상이 무섭다. 나는 속으로 시노에게 감사했다. 시노가 아니었으면 대체 저녁시간때까지 무슨 짓을 당

했을지 상상조차 하기 두려웠다.
“저 그럼 이만 가볼게요.”
그런데, 가야 누나가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난 듯이 눈을 반짝였다.
“아니다. 같이 가자. 지금 봐줄게.”
“헐, 가게는 어쩌고요?”
설마 그 생각이 우리 집을 방문하는 것인지 몰랐던 나는 더더욱 불안해졌다. 아무리 심심해도 그렇지, 우리 집

까지 찾아온다니 대체 뭘 하려고....
“어차피 내 가게인데 까짓거 문 좀 닫지 뭐.”
“나중에 부모님한테 혼나고 울지 마요.”
걱정마, 가야 누나가 엄지손가락을 들어올리며 자신만만해 했지만 역시 걱정되었다. 나중에 잘 변명해드려야겠

다. 딱히 가야 누나를 걱정한다기 보다는, 부모님께 한창 시달린 이후에 나에게 부릴 히스테리가 더 문제였다.
“나랑 같이 가는 게 그렇게 싫어?”
“아뇨. 오히려 고맙죠.”
“그럼 입 다물고 안내나 하셔.”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가야 누나의 말에, 나는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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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누나는 분식집 유리문을 잠깐 잠궈놓고 나를 따라왔다. 어차피 바로 맞은편에 있는 건물이니 손님이 오시

거나 여차하면 바로 다시 돌아가면 되겠지만, 가야 누나는 만전을 기했다.
"문을 잠궈놔야 혹시 부모님이 와도 둘러댈 수 있거든. 잠시 화장실 갔다왔다는 식으로."
도둑 대책보다는 부모님 순찰 대책으로.
그렇게 가게 문을 잠구고 나서, 반대편에 있는 우리 집 대문을 열고 현관으로 들어서려는데, 가야 누나가 내 어

깨를 잡았다.
“집에 아무도 없지?”
“없죠.”
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 난 외동아들이고, 부모님은 출장 관련으로 다음 날까지 집에 돌아오시지 않는다. 만약

에 집에 누가 있다면 그건 도둑놈이거나, 간첩이거나, 시노일 것이었다.
“숨겨놓은 여자애 없지?”
“있었으면 좋겠는데요.”
“갑자기 들어가기 싫어지는데.”
“왜요?”
“몰라도 돼. 어여 문 열어. 그리고 보리차말고 오렌지 주스 있으면 그거 주고.”
“완전 자기 집이네. 오렌지는 없고 포도맛 있으니까 그걸로 참아요. 부엌 갔다 올게요. 아, 제 방은 2층에……

.”
방이 어디 있는지 설명해 주려는 데 가야 누나는 먼저 2층으로 올라갔다. 성급하기도 하셔라. 어차피 2층에는

방 하나뿐이니까 굳이 안내할 필요도 없겠지. 그리고 누나도 예전에 우리 집에 자주 놀러오곤 했으니 상관없으려

나.
나는 부엌에 들어가 포도주스를 준비했다. 덤으로 냉장고에서 우유팩을 꺼내 벌컥벌컥 마셨다.
아까 시노가 말했던 '노엔'은 역시 없는 것 같다. 신발장에도 신발이 없고, 인기척도 없다. 설마 2층에 있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2층에서 별다른 소리가 나지 않는 걸로 봐서는 2층에도 딱히 사람이 있는것 같지는 않았다. 2

층은 방음이 거의 안되니까. 나는 괜한 걱정을 한 셈이었다. 시노의 말은 역시 뭔가 이상했다. '노엔'이라니, '

노엔'이 왜 우리 집에 놀러온단 말이야?
나는 쟁반에 포도주스를 올려놓고 2층으로 올라갔다. 가야 누나가 내 컴퓨터 앞에서 이것저것 작동시켜보고 있

었다. 옆에 포도주스 잔을 갖다 놓는데, 가야 누나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뭐야? 컴퓨터 잘만 되잖아. 뭐가 고장난 건데?”
“네? 잘 된다고요?”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 우리집 컴퓨터는 고장이 났다.
가야 누나가 모니터를 자세히 보라고 나에게 손짓했다. 모니터 가까이로 가보니, 진짜로 멀쩡히 잘만 작동되고

있었다. 가야 누나의 조작에 별 대기시간도 없이 척척 작업을 수행하는 컴퓨터의 모습이 이질적으로 느껴질 정도

였다.
“최근에 보는 야동도 없네… 많이 쌓였겠다?”
“안 본다니까요?”
“쳇.”
가야 누나가 어떤 프로그램 창을 끄면서(아마, 내 컴퓨터 속의 동영상을 검색하는 프로그램이었던 것 같다) 혀

를 찼다. 가야 누나의 말대로 요새는 정품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침대 밑 보물.zip을 보지 않는 이상은 찾을

수 없는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 어째서 내 컴퓨터가 정상 작동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잠시만요. 지금 생각할 시간 좀 주세요.”
어째서 우리집 컴퓨터가 멀쩡히 돌아가고 있을까, 분명히 나는 컴퓨터가 제대로 안 돌아갔다는 걸 확인했는데.

그래서 시노랑 같이 피시방에 갔다 왔는데. 가야 누나 말마따나 성능 좋은 집 컴퓨터가 있는데 굳이 피시방에 갈

이유가 없는데.
아무래도 내가 잘못 알고 있었나 보다.
“미안해요. 제가 잘 못 알고 있었나봐요.”
그리고 순간, 세상이 변했다.
마치 어느덧 깨닫고 보니 내가 숨을 쉬고 있더라, 혹은 내가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은 느낌이었다.

거추장스럽고 불쾌한 느낌이 콕콕 찔러왔다.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인데도 어딘가 위화감이 느껴지는. 그 거슬

리는 감각에 뒷목이 타 들어가듯이 아팠다.
그 말 그대로, 위화감이었다.
어째서일까, 나는 가야누나를 보았다. 가야 누나는 내 컴퓨터 전원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위화감의

정체가 가야 누나? 아니다, 그쪽이 아니었다. 나는 좀 더 생각을 했다. 무언가 이상했다. 무언가 한가지 놓치고

있었다.
가야 누나가 왜 왔을까, 내가 불러서. 내가 가야 누나를 왜 불렀지? 컴퓨터를 고장 내서, 그럼 컴퓨터가 왜 고

장 났지? 몰라. 내가 고장 낸 게 아니다. 근데 난 외동아들이고, 부모님은 출장 중이시다. 그럼 대체 누가? 시노

? 가야 누나?
그리고 나는, 아련한 기억 속에서 어떤 여자애를 떠올렸다.
“가야 누나…….”
“응? 왜?”
가야 누나의 목소리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그 점이 나를 더 무섭게 했다. 나만 알아차린 걸까, 가야 누나의 아

무렇지도 않은 태도가 오히려 더 공포스러웠다. 어째서 모르고 있는 거지?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야 누나

에게 한가지 물어봤다.
“좀 뭐 이상한 거 없어요?”

"어? 없는데?"

"머리 아프거나 그러진 않아요?"

“뭔소리야?"
가야 누나는 뚱한 표정을 지었다. 전혀 모르고 있는 건가. 나는 암담해졌다. 가야 누나는 느끼지 못하고 나 홀

로 이 비현실적인 감각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쳤다.
“가야 누나. 죄송해요. 컴퓨터는 나중에 볼게요.”
“응? 뭐야, 뭔데?”
어째서 지금까지 눈치를 채지 못했던 걸까. 나는 어리둥절해 하는 가야 누나에게 거짓말을 했다.
“죄송해요. 저 갑자기 어지럽네.”
“뭐야? 괜찮아? 아 설마 아까 머리 아파서 물어본거였어?”
“아, 네.”
"야, 그런건 빨리 말해야지! 진짜 괜찮아? 병원은 안 가봐도 돼?"
"네, 괜찮아요. 그냥 좀 어지러워서. 잠깐 쉬면 괜찮겠죠."
가야 누나는 필사적으로 자기를 밖으로 내보내려는 내 눈빛을 읽었는지, 더 물어보지 않았다. 나는 1층까지 내

려와서 가야 누나를 배웅해 주었다. 그러면서 애써 괜찮은 척했다. 다행히 가야 누나는 내 안색을 슬쩍 보더니, 내 상태가 조금 나아졌다고 믿는 것 같았다.
"괜찮은거지?"
"네. 헤헤, 수면 부족 때문인가?"
"게임 때문이거든? 게임 좀 줄여."
"알았어요. 죄송해요. 나중에 꼭 친구들 데리고 올게요."
“퍽이나 그러겠다. 알았으니까 푹 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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