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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세상의 레아
글쓴이: Bannya
작성일: 11-10-15 23:50 조회: 3,904 추천: 0 비추천: 0

이상한 세상의 레아

Leah in WonderWorld

얼마 전에 한 연예인이 자살을 했다.

그녀를 따라 목숨을 끊는 모방자살조차 이제는 한 물 간 시들한 이슈가 되었지만, 나는 지금이라도 그 대열에 합류하고자 한다. 딱히 그 연예인을 좋아했다거나 한 건 아니다. 오히려 나는 그 연예인이 죽은 뒤에야 그녀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을 정도니까.

그런데 굳이 모방자살을 택하는 이유는, 나의 죽음이 화젯거리가 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고층건물에서 뛰어내리거나 농약을 먹고 죽는다면 경쟁식교육이 주는 폐해니 뭐니 하면서 이슈로 떠오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죽는 진정한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알면 안 된다. 그 사실이 알려지면 나 개인의 불명예는 물론 전 인류가 공황에 빠질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나는 -----------!!!! 갑자기 머리가 쪼개질 듯이 아프다. 일찍이 경험해 본 적 없는 고통이다. 어째서인지 모르겠다, 아니, 더 깊게 생각하기 싫다.

이미 옷들을 다 빼 놓은, 높이가 2m정도 되는 옷장 앞에 선다. 불 꺼진 방의 나무 옷장은 마치 관과 같은 느낌을 준다. 그래, 관이다. 나의 이 짧았던 19년 인생의 마지막을 장식해 줄, 내 관이다. 피아노 의자 위에 서서 떨리는 손으로 마름모 모양으로 늘린 옷걸이를 잡는다.

현관문이 열리는 전자음이 들린다. 아빠가 돌아온 것이다. 이제 곧 지하실로 내려가서, 아니 실험실이라고 불러야 하려나? 어쨌든 내가 내려갔었다는 것을 알고는 당장 내 방으로 오겠지. TV에서는 매일 인류와 국가의 미래를 위해 어쩌구하시는 고명한 과학자님께서 감히 그런 짓을 할 줄은 몰랐다. 어떻게 ------------------!!!! 크윽!! 그래, 이런 생각은 그만하고 그냥 빨리 죽자. 내가 왜 죽으려는건지는 몰라도 이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도 나쁘지는 않잖아?

손의 떨림을 억누르며 옷걸이에 목을 멘다. 그래, 여기다. 목젖과 턱 사이의 이 부분. 심호흡을 하고, 의자를 뒤쪽으로 넘어뜨린다.

덜컥.

옷걸이가 목을 파고들며 시야를 아래쪽으로 당긴다. 살 밖에 없는 곳이라 그런지 깊숙이 파고든다. 괴롭다. 숨이 안 쉬어지는 건 둘째치고 아픔이 괴롭다. 버둥거리지 않으려 했지만 나도 모르게 버둥거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버둥거릴수록 고통만 배가 될 뿐이다. 양 옆의 벽을 손으로 짚지만, 땀 때문인지 자꾸만 미끄러진다. 하지만 그래도 좀 전의 그 두통보다는 이게 낫다. 게다가 나는 죽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지 않은가. 그러던 와중에 점점 목의 고통이 사라져간다. 그와 더불어 시야도 점점 흐릿해져간다.

그 때, 갑자기 시야가 바뀐다. 이것이 주마등인건가 했지만, 처음 보는 광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저 멀리 발 아래에 있는 침대, 하얀 잠옷을 입은 채 버둥거리는 내 몸. 맹세코 내가 목을 멘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렇다면, 이건 뭐지?

양복을 입은 노인과 메이드복을 입은 어린 소녀가 시야 안으로 뛰어 들어온다. 당황한 표정으로 소리를 지르며 침대 위로 뛰어올라온다. 특히나 노인은 세상의 종말이라도 본 듯 한 끔찍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상하게 노인의 얼굴이 낯이 익다.

다시 시야가 바뀌자 이번에는 아빠가 나를 붙잡고 있다. 아빠는 나를 위로 들어올리려 하고 있다. 생명이 경각에 달린 상황이지만, 궁금증이 가시질 않는다. 방금 그건 대체 뭐였을까, 전생의 기억 같은건가? 나는 전생에 이어 현생에서도 목을 메 자살을 한건가?

그 때 또 시야가 바뀌어 아까의 노인이 보인다. 아, 누군가 했더니 이 끔찍한 표정의 노인은 내 할아버지다. 할아버지는 내 허리춤을 붙잡은 채로 내 머리 위 쪽을 향해 손을 휘두른다. 갑작스레 침대를 향해 시야가 곤두박질친다. 할아버지가 나를 받지만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정신을 잃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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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은 것 같다.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몸에서는 감각이 느껴진다. 마치 아무도 없는 해안고속도로를 오픈카로 시속 200킬로미터로 달리는 듯한 느낌. 하지만 내 몸에 세차게 부딪히는 이건 분명 바람은 아니다. 이것은 바람보다 훨씬 밀도 있고 깊으며, 뭔가...

[호오, 누군가 했더니 그 녀석의 아들인가?]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니, 들리는 게 아니다. 이건...

[흥미롭구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그 놈이 한 짓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뭐 어차피 나는 이걸 막을 수도 없고 하니 한 번 지켜봐주지. 하기야 너 하나가 뭐 얼마나 문제가 되겠냐만은...]

갑자기 가슴에 느껴지는 엄청난 압박과 함께 목소리가 끊긴다. 한동안 숨을 안 쉬고 있었는지 반사적으로 입을 열어 공기를 한껏 빨아들인다.

“하아아아~ 콜록! 콜록! 콜록!”

갑자기 들이마셔진 대량의 공기에 기침이 나온다. 목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통증에,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음을 깨닫는다. 아, 실패한건가. 자살했다가 실패한 것만큼 쪽 팔린 것도 없다던데...

힘겹게 눈을 뜬다. 그러자 아까의 그 할아버지와 소녀가 흐릿하게 보인다. 내가 눈 뜨는 것을 보자 그 둘은 뭐라뭐라 시끄럽게 떠들어댄다. 하지만 뭐라 그러는지 잘 들리지가 않는다. 할아버지가 팔을 휘두르자 내 얼굴이 옆으로 살짝 돌아간다. 뺨을 친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다. 할아버지는 얼마 전에 돌아가셨는데... 여기는 저승인건가? 나는 죽은 게 맞나?

할아버지는 연달아 내 뺨을 때린다. 그 덕에 점점 정신이 또렷해지며 시야가 되살아난다. 할아버지의 얼굴이 명확하게 보인다. 시야 다음에는 청각이 되살아난다.

“...you okay? Say something! Are you okay?"

...영어? 잠깐, 잠깐. 할아버지는 외국어라고는 천자문밖에 모르시는 분이셨는데? 게다가 서역이 어쩌구하면서 서양이라면 발악을 하실 정도로 싫어하시던 분이셨는데?

뭔가 말을 하려 했지만, 목의 통증에 제대로된 말 대신에 신음소리만이 흘러나온다.

“으윽...”

내 목소리를 들은 건지 할아버지는 안심한 표정을 지으신다. 그리고 옆의 소녀에게 뭐라뭐라 명령을 내리신다. 그러자 그녀는 내 시야에서 사라진다. 영어다. 분명 영어다. 호주에 2년 정도 유학을 다녀 온 나도 아직 완벽히 구사하기 힘든 완전 네이티브 스피커 급의 영어다. 할아버지는 또 나를 보며 뭐라뭐라 하시지만 나는 잇따른 충격에 멍한 상태여서 잘 들리지 않는다.

“...할아버지?”

잠시 뒤, 내가 목의 고통을 참아가며 말을 하자 할아버지는 갑자기 얼어붙은 듯 움직임을 멈춘다.

“할아버지 맞아? 여기는 어디야? 나, 죽은거야?”

하지만, 할아버지는 그대로 얼어붙으신 채 말이 없다. ...못 알아들으시는 건가. 그렇다면 저 분은 할아버지가 아니다. 하긴, 서양 거라면 손자 게임기도 집어던지시던 분이 저런 양복을 입고 계실 리가 없지. 그러고보니 이목구비나 피부색 같은 게 살짝 다르다. ...헌데, 왜 저러고 얼어 있는걸까

할아버지, 아니 노인은 한 손을 뻗어 내 눈과 이마를 덮는다. 땀이라도 닦아주려는 건가, 나는 연고와 진통제가 필요한 것 같은데... 노인의 작은 중얼거림과 함께, 나는 정신을 잃는다.

◇ ◇ ◇

“으응...”

의식이 돌아온다. 눈을 천천히 깜빡인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고풍적인 나무 천장. 내 집은 콘크리트라 저런 나무 천장이 없다. 아빠가 있는 곳이 아니라 노인이 있는 곳에 떨어진 건 아무래도 꿈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몸을 일으켜 앉는다. 목이 칼칼해 주변을 둘러보니 침대 옆 작은 선반에 물과 작은 도기 주전자가 있다. 주전자는 가스 레인지 비스무리 한 것 위에 올려져 있지만 냉수다. 시원한 물을 벌컥벌컥 연달아 두 잔이나 들이키자 정신이 살짝 돌아온다. 목의 통증은 없다. 손을 대봐도 상처의 흔적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약을 되게 좋은 걸 쓴 것 같다.

침대 끝에 걸터앉은 채로 주위를 둘러본다. 나는 굉장히 넓은 방의 역시나 굉장히 넓은 침대 위에 앉아 있다. 너비도 너비지만 높이도 상당해 발이 땅에 닿지 못 하고 힘 없이 대롱거린다. 침대 주변에는 엷은 커튼이 둘러쳐져 있다. 거 있잖은가. 유럽 영화에 자주 나오는 공주님침대. 커튼을 거는 봉이 꽤 높이 달려 있다. 어제 나는 저기 목을 맸던 것 같다.

...아니, 나는 어제 옷장에서 목을 맸는데. 여기는 대체 어디야? 왜 내가 이런 호사스런 방의 공주님침대에 앉아 있는 거냐구! 분홍색만 아니었다면 그냥 고급 침대라 칭했을 수도 있었을텐데 빌어먹을, 분홍색이라니! 그리고 사람들은 한국인이면서 왜 한국어를 못 알아듣고 영어를 쓰는거지? 어디 미국의 한인교포가 사는 저택으로 납치라도 당한 거야? 게다가 머릿속은 이렇게 혼란스러운데도 몸은 가만히 앉아 있다. 그것도 곧고 바른 자세로. 평소의 나라면 상상도 못 할 자세다. 뭐지, 세뇌라도 당한건가?

아니야. 진정하자. 분홍색이 뭐 어때. 요즘엔 남자들도 분홍색 옷 잘만 입잖아? 나만해도 분홍색 트렁크 팬티를 가지고 있는걸. 그리고 몸은 아직 갑작스런 환경 변화에 제 기능을 못 하고 있는거야, 그래 그거야. ...하지만 여기가 병원이 아니란 것만은 확실하다. 이태원에라도 떨어진 건가, 나는?

진정이 덜 된 나는 불안하게 주위를 둘러보다가 거대한 거울에 눈이 닿는다. 공주님 침대에 어울리는 트리플 라지 크기의 거울이다. 그 안의 한 소녀와 눈이 마주친다. 하얀 잠옷을 입고 있는 그녀는, 미소녀란 단어는 바로 나를 위해 있는 거다!, 싶을 정도로 이쁘고 귀여운 얼굴을 하고 있다. 게다가 공주님 침대에 앉아 있으니 정말 공주가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눈부시다. 중학교졸업반정도는 되 보이는데 가슴이 저렇게 작다니 조금 슬프기는 하지만 ...아?

잠깐. 거울이잖아? 왜 그 안에 내가 아닌 다른 아이가 보이는 거야? 그것도 나랑 똑같은 거대한 크기의 공주님표 분홍 침대에, 나랑 같은 자세로! 게다가 장미꽃이 달린 컵을 들고!

아냐, 아냐. 아까부터 너무 흥분한 것 같아. 눈을 감고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그래, 저건 그냥 복도를 통해 보이는 반대편 방인거야. 그 방에서 자고 있던 저 소녀도 우연히 나와 같은 시간에 잠에서 깨 우연히 나와 같은 자세로 침대에 앉아 우연히 나와 같은 컵으로 물을 마시고 우연히 나와 눈이 마주친 거야. 그 정도 우연이야 인생의 곳곳에서 일어나잖아?

하지만 도저히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나는 분명 고딩에 어울리는 짧은 커트머리일텐데 목에서 머리카락 같은 것의 감촉이 느껴진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진정하자. 그러고 보니 가슴께에서는 처음 느껴보는 이상한 것의 존재가 느껴진다. 닥치라고! 아, 아니지. 나에게 화를 내서 뭘 어쩌겠다는 건지.

살며시, 눈을 뜬다. 그녀도 나와 같이 한 쪽 눈은 감고 다른 눈만을 써서 나를 살펴보고 있다. 이런, 제기랄! 아아아아아, 잠시만 기다려봐. 그래, 이건 그거야. 저 여자아이도 나처럼 당황해서 눈을 감고 있다가 살며시 눈을 뜬 거야! 그거라구! 애초에 말이 안 되잖아, 성별이 바뀌다니! 나 자신을 납득시킬 필요가 있다. 그래, 거울 속, 아니 복도 건너편의 그녀에게 처음 보는 사람한테는 절대 하지 않을 짓을 해 보자.

눈을 뜨고, 소녀를 향해 중지를 세운다.

당신이라면 처음 보는 왠 남자가, 지나가는 모든 아저씨들의 머릿속에 위험한 상상을 부여할 정도의 미모를 가진 당신에게 갑자기 퍽*를 날린다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아마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려버릴 것이다. 하지만 내 앞의 사랑스러운 소녀는 쌈빡하게도 내게 같은 손가락을 세워 보인다. 그것도 내가 그러기를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동시에 말이다.

이건 꿈이다! 그래, 꿈이다! 아무래도 요즘 스트레스가 심했나 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꿈을 꾸다니, 아하하하. 빨리 깨야겠다. 아니면 정신이 버티지 못 할 것 같다.

지금 이게 꿈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가장 손 쉬운 방법 중 하나가 코를 막고 숨 쉬기다. 코를 막고 코로 숨을 쉬는데 숨이 쉬어진다면 그건 꿈이고 지금 나처럼 그저 단지 숨 막혀 죽을 것 같다면 그건 현실이라는 뜻이다 니미럴.

힘 없이 손을 떨군다. 한동안 멍하니 내 손을 바라보던 나는 고개를 돌려 다시 거울을 바라본다, 그러자 그녀도, 아니, 거울 속 나도 나를 바라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저승? 아닌 것 같다. 저승에서 뭐하러 사람 성별을 바꿔놔.

그래, 좋게 생각하자. 이 때까지 남자로 살다가 여자로 바뀌었다. 19년 남자로 살다보니 질릴 때도 됬잖아? 게임에서는 남캐 키우다 여캐 키우다 그러는데 실제 인생이라고 뭐 안 될 거 있어? 여자로 한 10년 살다가 또 지루해지면 다시 옷장에서 목 매고 다시 남자로 돌아가면 되는...! 아, 아니, 이게 아니지.

그래, 여자로 바뀌었다. 그것도 저렇게 이쁘고 귀여운 소녀로 바뀌었다. 게다가 집도 좀 사는 거 같다. 말 그대로 패리스힐튼이잖아? 그거면 충분하지 않아? 세상 모든 남자들 다 한번 씩은 여자가 되는 상상 해봤잖아?

침대에서 일어나 방 안을 거닐기 시작한다. 그래 좋다. 난 여자가 됐고, 꿈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여기는 어딘가. 성별이 바뀌고, 있던 공간까지 바뀌었다. 혹시 시공간이 다른 세계 뭐 그런 거일까 하고도 생각해 봤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다른 세계에까지 왜 인간이 살고 있으며 그것도 왜 하필이면 영어를 쓴단 말인가. 차라리 EA에서 만든 ‘사람 키우기3’ 게임 속으로 들어와졌다, 라고 하는 게 훨씬 설득력 있겠다. 어쨌든 결국 결론은 여기는 내가 살던 동네가 아니라는 것이다.

방을 거닐다보니 어느새 창가 가까이에 와 있다. 문득 바깥이 보고 싶어진 나는 내 가슴께까지 오는 선반 위로 기어 올라가 커튼을 걷고 창밖을 바라본다. 큰 유리창 너머 아래로는 정원이 보인다. 이 동네 사람들은 다 이런지, 아니면 이 집이 잘 사는지 모르겠지만, 방의 크기처럼 정원 또한 대단한 크기다. 한 쪽 구석에 연못과 테라스가 있을 정도니 말 다 한 것 아닌가. 게다가 정문에는 병사들이 서 있다. 무슨 아라비아 석유 대부호의 딸내미라도 되는거야?

문득 누군가가 내 시선을 끌려고 팔을 붕붕 휘두르는 것이 보인다. 잠들기 전에 보았던 메이드 복장의 소녀가 정원에 서 있다. 그녀는 내가 바라보자 팔 흔드는 것을 멈추고는 공손히 허리를 숙인다. 그 모습에 나는 반사적으로 작게 손을 흔들어 준다. 그러자 그녀는 그것에 만족한 듯 해맑게 웃어보이고는 다시 낙엽 치우기에 열중한다.

선반에서 내려오는데 뒤에서 문이 열리고 예의 그 노인이 들어온다.

“아, 일어나셨군요, 아가씨.”

참고로 말하는데 방금 저 노인은 영어를 썻다. 단지 내가 머리 속에서 번역을 한 것 뿐이다.

“꽤나 오랫동안 안 일어나시길래 ????이라도 난건가 하고 걱정하던 참이었습니다.”

이런, 저 할아버지 너무 어려운 단어를 쓰잖아. 발음도 못 알아먹겠네. 뭐, 어차피 목 맨 후유증 그런거겠지만.

“난 괜찮아.”

우와. 목소리도 좋잖아? 게다가 발음이! 우와 대박인데?

“그런데, 할아버지는 누구야?”

내 목소리가 더 듣고 싶은 마음에 아무 말이나 되는대로 얘기한다. 그건 그렇고 진짜 좋은 목소리잖아~~!!! 납치해다가 나만의 잉꼬로 새장에 가두어..!! 아, 나지, 참.

“저는 이 저택의 스튜어드입니다.”

스튜어드? 뭐, 나이를 보나 양복을 보나 집사님이라는 거겠지. 반사적으로 나간 하대에 자연스레 대답하는걸 보면 집사님이 맞는 것 같다. 그건 그렇고 이 할아버지 보면 볼수록 돌아가신 내 친할아버지를 보는 것 같단 말이야. 만일 내가 할아버지와 사이가 조금만 좋았더라면 다시 이곳이 저승이 아닐까 하고 의심해 보았을 정도로.

...응? 어라. 이런, 나 위험한 거 아닌가? 이 저택의 아가씨라면 당연히 알아야 할 사람에게 당신 누구냐 그런거잖아. 이런, 괜히 이상한 거 물어보는 게 아니었는데.

“음... 아가씨, 혹시 아가씨의 성함은 기억하시나요?”

“신우... 아니, 음... 그게...”

당황해서인지 순간적으로 내 이름이 툭 튀어나와 황급히 얼버무린다. 아니 내가 얘 이름을 어찌 압니까? 나는 얘가 여자인 것도 방금 알았어요.

그런데 나를 바라보는 집사님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이상하게 여기는 표정이라는 얘기가 아니고, 뭐랄까, 여러 안 좋은 감정이 섞인 듯한 눈빛. 하지만 어찌 보면 기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집사님?”

내 목소리에 집사님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헛기침을 한다.

“험, 험. 죄송합니다.”

그리고 다시 진지한 태도로 말을 잇는다.

“그렇다면 아가씨는 어째서 제가 이다지도 걱정하는지는 알고 계십니까?”

당연히 알고 있지. 자살시도 때문 아닌가. 하지만 나는 방금의 실수를 거름 삼아 이번에는 섣불리 대답하지 않는다. 나야 확실히 자살시도가 맞지만, 원래 이 몸의 주인은 어떤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살인미수였을지도 모르고.

“응, 내가 자살하려 한 것 때문 아니야?”

하지만 어느샌가 내 입은 의지와 상관없이 자연스레 열리고 있다. 이런 생각 없이 막 말하는 년을 봤...! 아, 나지, 참.

“음... 기억을 하는 부분도 있으시고, 못 하는 부분도 있고 하신 게 아직 후유증에 시달리고 계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원래 머리는 공기가 안 통하면 기억도 날아가고 뭐 그러는 법이니까요.”

집사님 뭔가 굉장히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그럼 우선, 씻으시는 게 어떠십니까?”

...응? 잠깐, 뭐라구요?

“에, 에?”

“안 그래도 씻는 걸 좋아하시는 분이 몇일 동안 꼼짝 않고 누워만 계셨으니 찜찜해 하실 것 같아 드린 말입니다만... 주제넘은 참견이었나요?”

씻으라는 건, 그러니까 옷을 모두 벗고 알몸으로 탕에 들어가서, 여기저기 문지르고, 비비고, 그리고............꿀꺽.

“아, 아니. 마침 나도 씻으려던 참이었어.”

애써 떨리는 목소리를 진정시키며 말한다.

◇ ◇ ◇

“에휴~.”

애꿎은 물 때리는 소리만 넓은 욕실을 울린다.

애초에 나는 뭘 기대한건지... 이제 이건 내 몸인데, 내가 내 몸을 보고 흥분할 리 없잖아? 욕실에 들어오고나서도 내 몸보다는 욕실의 황금색 손잡이나 아름다운 문양이 가득한 타일같은 것에 눈이 먼저 간 걸 보니, 이 몸은 천성 여자다.

어쨌든 이걸로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바뀐 것은 영혼이다. 만일 뇌가 째로 바뀐 것이라면 여성의 몸을 보고 흥분했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뇌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바뀌었다는 거고, 나의 짧은 지식으로는 영혼 외의 것은 생각할 수가 없다.

하지만, 영혼...이라니? 종교라면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믿는다기보다는 단순히 가르침을 좋아한다는 느낌이기에 나는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그것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는 것 같다.

아니 그 전에, 어째서 나랑 얘였을까? 보통 소설이나 영화에 이런 게 나오면 뭔가 개연성이 있잖아? 공통점이라든가, 무슨 실험이라든가. 일단 나는 스스로 목을 맸을 때니 실험은 확실히 아니다.

그래, 공통점이다. 자살시도를 했다는 공통점. 하지만 그걸로는 약하다. 세상에 자살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 중에서 몸이 바뀌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좀 더 깊숙이 들어가 봐야 한다. 어쩌면 자살이유가 공통점이었을지도... 에이, 그건 말도 안 된다. 같은 이유로 자살하면 몸이 바뀐다라니, 어느 삼류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 아닌가. 그러고 보니 내가 자살하려고 했던 이유가 뭐였더라? 맞아, 분명...

움찔

본능적으로 곧 찾아올 고통에 대비하듯 몸을 움츠렸지만, 고통은 찾아오지 않는다.

“어라?”

내가 자살하려던 이유는...? 아버지의... 실험실에서...?

이상하다. 어째서 고통이 찾아오지 않는 것일까. 그 지옥같은 고통을 다시는 안 겪어도 된다니 기쁘기는 하지만 그래도 무언가 찜찜하다.

한동안 곰곰이 고민하던 나는 이내 명쾌한 해답에 도달한다.

“몸이 바뀌었잖아~!!!”

아마도 그 고통은 영혼이 아니라 뇌에 걸린 일종의 제약 같은 것인가 보다. 하기야 영혼에 무슨 짓을 하는 기술이 있기야 하겠어? 그렇다는 건 결국, 내 기억이 들어 있는 영혼은 여기 있지만, 제약이 걸린 몸은 저 멀리 어딘가에 있으니 실험실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마음껏 생각해도 고통은 찾아오지 않는다는 거다!!!

...근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버지의 실험실에서. 그 뒤가 떠오르지 않는다. 아무리 열심히 기억하려 해 봐도, 아버지의 실험실 비밀번호를 누르던 때와 옷걸이가 내 목 깊숙이 들어오던 때, 그 사이의 일은 아무것도 떠오르지가 않는다,

“에이!”

손바닥으로 수면을 내리친다. 손을 피해 사방으로 퍼졌던 물이 다시 모이면서 서로 부딪힌다. 잠시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차피 생각해봐야 답도 안 나오는 거, 일단 씻기나 하자. 비누나 바디워시 같은 건 어디 있으려나?

타일에 발을 딛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리며 아까 전의 메이드가 안으로 들어온다. 그녀는 외모에 어울리는 밝고 명랑한 목소리로 말한다.

“아가씨, 목욕시중을 들어드릴까요?”

“아, 아니. 괜찮아.”

아주 자연스레 하대가 나간다. 아무래도 이 아가씨는 하대가 몸에 밴 것 같다.

“그럼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주인어른께서 함께 점심을 먹자하시니 너무 오래 계시지는 마세요.”

그리고는 다시 문이 닫힌다.

...왠지 서글프다. 저렇게 이쁜 아이에게 알몸을 보였는데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니.

◇ ◇ ◇

목욕을 마치고 나오니 메이드가 수건으로 내 몸을 구석구석 부드럽게 닦아준다. 으음... 뭐라 말은 못 하겠는데... 감촉이 참... 묘하구만.

“아가씨 일어나셔서 다행이에요. 그 동안 팔자에도 없는 집안 청소다, 마당 쓸기다 하면서 얼마나 지루했다구요.”

그녀는 나에게 속옷을 입혀주며 말한다. 아무래도 얘는 내 전담 메이드인 모양이다.

이 동네는 옷 입는 방식도 희한하다. 드레스는 중세풍의 그런 나풀거리는 드레스인데, 안에 입는 옷은 속옷 뿐이 없다. 영화에서 흔히 보는 코르셋이나 속바지 뭐 그런 건 일체 없다는 말이다. 뭐, 나야 그 편이 편하고 좋긴 하지만 말이다. ...드레스를 입는 폼이 무지하게 자연스럽다, 제기랄.

옷을 다 입자 이번에는 화장대에 앉히고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려준다. 드라이어에는 전깃줄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가 손을 대자 기다렸다는 듯이 따뜻한 바람이 나온다. 그러고 보니 불을 키거나 끌 때도 벽에 박혀있는 네모난 돌에 손을 댔었다. 처음에는 열감지 시스템인가, 했지만 보면 볼수록 그런 첨단기술이 쓰인 집 같지는 않다.

머릿결을 쓰다듬는 기분 좋은 손길을 느끼며, 거울 속의 나를 감상하듯이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누군가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누구더라. 요즘 뜨는 신인가수였는데...

“아가씨는 참 머릿결이 고우세요.”

갑작스레 그녀의 칭찬이 날아온다.

“응? 아, 고마워. 너는 조금 푸석거려보이는걸? 아, 그... 무슨 힘든 일이라도 있었어?”

이런 미친! 이런 상황에는 너도 머릿결 곱다고 말 하는 게 예의 아냐? 좀만 방심했다, 하면 마음에 있는 말이 그냥 막 튀어나가는구만. 분명 이 몸의 전주인은 평생 거짓말이라고는 못 하고 살았을거다.

“...힘든...일이요.”

그녀의 손길이 멈춘다.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걸까? 거울을 통해 본 그녀의 몸은 작게, 하지만 확실히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울고...있는 건가.

“야, 야. 왜 그래, 갑자기?”

“아가씨... 저랑 약속하셨으면서... 다시는 그런 짓 안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으면서...”

목 매단 걸 말하는건가? 하지만 나한테 그렇게 말해봤자...

“대체 왜 그러신거에요? 그러게 제가 지하실에는 가지 말랬잖아요!”

그녀는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며 나에게 소리지른다.

“아, 아니... 저기...”

나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른다. 애초에 여자애가 내 앞에서 운 경험이 한 번도 없어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우왕좌왕 하고 있다.

“제가, 얼마나... 얼마나...”

자리에서 일어나, 감장에 북받쳐 말도 제대로 하지 못 하는 그녀를 꼭 끌어안는다.

“미안해. 저기... 앞으로 다시는 안 갈게.”

“거짓말! 전에도 그렇게 말했으면서!”

그, 그야 니가 이렇게 나오면... 이라고 다시 한 번 마음 속의 말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억누른다.

“아니야, 이번엔 진짜야. 진짜로 안 내려갈게.”

“읏... 꼭이에요?”

“꼭. 다시는 안 내려갈게.”

그리고도 그녀는 한참을 내 품에 안겨 울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이 몸의 원래 주인은 전에도 자살시도를 몇 번 했다는 거 같다. 그래서 이 메이드는 그것이 전담 메이드인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아 마음고생이 심했다는 것 같고. 이래저래 힘들구만, 아랫사람이라는 건.

한동안 안겨 있던 메이드는, 진정이 되었는지 나에게서 얼굴을 뗀다. 울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살며시 고개를 들어 아직도 눈물이 고여 있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쳇, 내 몸이 남자였다면 꽉 껴안아줬을 텐데.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해준다.

“아가씨...”

“가자.

그녀가 바알게진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걱정 말라는 식으로 한 번 웃어주고, 문을 열어 밖으로 나선다.

캬, 나 완전 멋지지 않냐? 반하겠다, 진짜. 이러다가 얘가 나 좋다고 결혼하자고 하면 어떡하지? ......남자였을 때 이런 일 있었으면 얼마나 좋아.

그렇게 한참을 자아도취에 빠져 메이드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고나서야, 한 가지 중대한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이 집의 구조를 모르잖아. 식당이 어디 있는건지 내가 어떻게 알아?

어째서인지 발코니로 향하는 문 앞에 도착해서, 혹시 메이드가 이상하다는 점을 눈치채지나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슬며시 뒤를 돌아본다. 그녀는 내 시선을 눈치채고는 환하게 웃어보인다.

“이제 저 괜찮아요, 아가씨.”

...아무래도 얘는 내가 자기 눈물 마를 동안 일부러 여기저기 돌아다녔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뭐, 그런 오해는 좋긴 하다만... 이를 어째. 그 때, 나를 구원하는 향기로운 냄새가 난다. 분명 음식 냄새다. 이 냄새를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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